영조 대에는 기존에 있던 제도 가운데 한동안 시행하지 않은 국가 의례를 복구하여 시행하는 일이 잦았다. 그중 하나가 1767년(영조 43년)에 실시한 친경례(親耕禮)와 친잠례(親蠶禮)이다. 친경은 왕이 몸소 농사를 짓는 모범을 보이는 국가 의례이며, 친잠은 왕비가 직접 누에치기의 모범을 보이는 국가 의례이다.
영조가 선농단(先農壇)에서 친경례를 거행하는 한편 정순왕후는 경복궁에서 친잠례를 거행하여 친잠례를 복구하였다. 영조는 이전에도 친경례를 행한 적이 있지만 왕비가 친잠례를 거행한 것은 1620년(광해군 12년) 이후 처음이었다.
1767년 2월 26일에 친경례를 거행하고, 3월 10일에 친잠례를 거행한 뒤에 두 행사를 함께 기념하여 3월 11일에 정시(庭試) 문무과를 시행하였다. 영조는 특별히 이 시험에 ‘경잠과(耕蠶科)’라는 이름을 붙였다.
친경과 친잠 행사가 끝난 뒤 왕이 참석한 가운데 행차에 참여한 유생과 병사들을 상대로 시험을 시행하였다. 문과는 경희궁 숭정문에서 시행하여 김문순(金文淳) 등 3명을 뽑았고, 무과는 경희궁 건명문과 모화관에서 나누어 시행하여 강복린(姜福麟) 등 264명을 뽑았다. 3월 15일에 경희궁 숭정전에서 합격증서인 홍패와 어사화 등을 나누어 주는 방방례(放榜禮)를 거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