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는 무신란(戊申亂)이라는 대규모의 반역 사건과 잦은 재해로 충청도·전라도·경상도에는 각종 비기류(祕記類)가 유포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에 따른 각종 모반 사건이 잇따라 일어나자, 향촌 사회에는 기존 지배 체제에 대한 회의와 자기 보호를 위한 소극적인 반항이 일고 있었다.
1733년 경상도·충청도 지방을 엄습한 기근으로 굶어죽은 자가 연인원 40만여 명이나 되었다. 또한 기근에 이어 전염병도 창궐하여 사회 불안이 가중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남원에서 무신란의 처리 결과를 비방하는 괘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 사건이 일어나자 행적이 수상한 인물들은 모두 혐의를 받고 체포되었다.
즉, 당시 훈장을 하고 있던 곽처웅이 무신란 이후 평소 행적이 수상하였다는 혐의를 받아 체포되었다. 이어서 김원팔(金元八)·윤징상(尹徵商)·최봉희(崔鳳禧) 등도 같은 혐의로 체포되었다. 이들은 모두 양인이거나 몰락한 양반층으로 승려인 태진(太眞)에게서 비기를 받아 이를 은닉, 전파시켰다는 것이다.
이들이 소유했던 비기류의 내용은 모두가 한결같이 무신란의 처리 결과에 대한 불만이었다. 또한, 성인이 곧 나타나 모든 가정에 똑같이 대동세계(大同世界)가 열리기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볼 때 하층민들의 강한 사회 변혁의 의지가 담겨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들 연루인들은 평소 모반을 계획하고 있었던 사실도 추궁을 받았다. 훈장 곽처웅은 글재주가 우수한 지식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글로써 생활을 꾸려나가므로 가난을 면하지 못한 인물로 평소 왕조질서의 변혁을 갈구하던 처지에 있었던 것이다.
체포된 뒤 집에 숨겨둔 「풍신제문(風神祭文)」과 정부를 비방하는 흉서가 발견되었다. 이에 따라 남원괘서사건과의 관련 여부를 추궁받게 된 것이다. 또한,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과거시험장에 들어가서는 남을 위해 글을 지어주고 자기는 시험지를 제출하지 않은 행적이라든지, 양반층과는 교유를 끊고 양인들과 어울려 살았던 사실들이 모두 모역의 혐의 사실로 추궁받게 된 것이다.
이렇게 거듭된 친국이 진행됨에 따라 이른바 「풍신제문」과 14구의 흉서는 자신이 쓴 것임이 탄로나게 되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더 이상의 사실을 밝혀낼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흉서와 남원의 괘서 사건과의 관련 여부는 미궁인 채로 사건은 종결되었다.
그러나 전후 사실로 미루어보아 이 사건은 당시 향촌 사회가 성인의 출현을 갈망하고, 천지기운의 변화를 바라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태동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또한 평소 글 잘하는 지식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먹고 살아가기가 어려워 여러 곳을 유랑하는 18세기 직업적 고용 훈장의 처지에서 왕조 지배 체제에 대한 비판적 태도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진다.
예전부터 유학적 가치 질서에 가장 충실했던 훈장 신분이 시대적 변천과 더불어 그 성격에 있어서 변모를 예고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러나 특정 사회세력과 연관을 가진 점이나 서당 조직과 훈장 신분을 사건에 적극 활용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조직적인 모반 사건으로는 볼 수 없다. 단, 무신란 이후 자주 일어났던 훈장 모역 사건의 초기적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