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해 소론계 심정연(沈鼎衍)·신치운(申致雲) 등의 대규모 역모사건을 돕기 위해 훈장 유봉성(柳鳳星)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사건이다. 이 사건은 신임사화의 주역이었던 김일경(金一鏡)의 잔존 세력을 주축으로 한 소론이 주동이 되어 일어났다.
김일경은 소론의 영수 조태구(趙泰耉)와 함께 노론 측의 재집권을 막고, 노론 4대신을 사사하는 등 소론 집권에 주도적인 구실을 담당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영조의 즉위와 함께 신임사화(辛壬士禍)가 날조된 것임이 드러나자 그 일파의 처형 및 소론의 일대 몰락이 초래되었다.
이러한 정치집단간의 미묘한 갈등 상태에서 1755년에 이른바 나주벽서사건(羅州壁書事件)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이 수습된 뒤 시행된 토역경하정시(討逆慶賀庭試)에 심정연이 응시하였다. 이 때 심정연이 답안에 조정을 비방하고 집권파 대신들을 공격한 내용을 기재하였다가 발각, 체포됨으로써 대규모의 반역 모의가 드러났다.
그것은 심정연·신치운 등이 김일경의 조카인 김인제(金寅濟)·김유제(金有濟)·김덕제(金德濟) 및 이준(李埈)·강몽협(姜夢協)·박사집(朴師輯)·유수원(柳壽垣) 등과 결탁해 역모한 사실이었다.
사건 주모자들의 심문 결과 모반의 주요한 동기는 당화(黨禍)로 인한 소론의 몰락에 대한 불만에 있었다. 또한 이 모반 사건은 단기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많은 동지의 결합과 상당한 거병 계획 속에서 진행되었음이 밝혀졌다.
결국 이 사건은 소론 측의 연루 사실에 대한 부인에도 불구하고, 심정연·신치운·유봉성·유수원·이거원(李巨源)·박사집 등 수십명이 처형되고 소론 세력이 결정적으로 거세되는 계기가 되었다.
교영계는 춘천 지방을 공략할 군병(軍兵)을 취합하고, 이들을 통제할 기구로 활용되었다. 교영계의 가입 인물은 훈장 유봉성 이외에 심정연·윤혜(尹惠)와 강몽협·몽상(夢相) 형제 등 몰락한 양반 신분이 대부분이었다.
유봉성의 경우, 생계가 어려워 북중면(北中面) 팔처서당(八處書堂)의 훈장을 업으로 생활을 영위하던 한미한 사족 출신이었다. 이 계는 처음에 유봉성이 학동들을 교육시키기 위한 서당계를 표방하고 촌민들의 동의하에 조직한 것이었다. 그러나 역모를 도모하면서부터는 계의 중수(重修)를 빙자해 동지(同心之人)만의 계를 새롭게 조직하였다.
이들의 계획 속에는 각 동네의 향도복색(香徒服色)을 절취해 조선 후기 민란의 기초 신앙인 미륵신앙과 결속을 도모하였다. 동시에 영동 지역의 유리민(流離民)·기민(飢民)·승려 등 불만 하층 세력을 규합해 춘천 관아를 습격, 무기를 탈취해 서울로 진격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이 사건은 당시 몰락한 유랑지식인들이 서당을 변란음모의 거점으로 이용했던 사실을 특징적으로 보여준다. 18세기 중엽에 이르면 그들은 궁핍한 생계를 영위하기 위해 향촌 서당의 훈장으로서 의식주를 제공하는 곳을 찾아 벽촌·도서 등 전국을 전전하였다.
그들의 현실에 대한 비판 의식은 왕조 체제에 대한 변혁 의지로 발전되기도 하였으며, 향촌 사회의 기층민(基層民)들을 규합해 종종 모역 사건의 주모자로 변신하기도 하였다.
교영계사건은 향촌민들을 교화, 통제해 그들을 유학적 가치덕목으로 합일시켜야 할 훈장과 서당이, 오히려 그것의 파괴에 앞장섰다는 사실에서 봉건사회가 해체되고 있는 한 양상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