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공망(公望). 영의정 신흠(申欽)의 5세손이며, 대사간 신면(申冕)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신종화(申宗華)이고, 아버지는 신유(申輶)이며, 어머니는 관찰사 김세익(金世翊)의 딸이다.
1721년(경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예문관의 한림으로 벼슬을 시작하였다. 다음해 설서(設書), 1723년 춘추관기사관·지평(持平)·문학 등을 역임하였다. 소론의 신예로서 이때 노론의 거두였던 권상하(權尙夏)·이희조(李喜朝) 등을 축출하는 데 앞장섰다.
이듬해 홍문관수찬을 거쳐, 승문원교리로 있을 때 죽은 송시열(宋時烈)을 공박하는 소를 올렸다가 어진 사람을 무고하고 바른 사람을 질시하였다는 이유로 파직당하였다. 그 뒤 1727년(영조 3) 다시 복직되어 홍문관수찬·승문원교리를 거쳐, 1729년 예문관응교·승지를 역임하였다.
대사간에 재직하면서 과거 자신에 대한 중상모략을 변명하는 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1755년 나주괘서사건이 있은 직후 심정연(沈鼎衍)·김인제(金寅濟)·박사집(朴師緝) 등과 함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경상북도 흥해군에 유배되었다가 처형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