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도는 상황성을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에 일정하고 불변적인 행위규범을 가지지 못하며 그때마다 다른 행위양식으로 나타나는 특성을 가진다.
유학에서 권도는 불변의 경상(經常)에 대해 상대적인 성격을 가지는 것으로 정의된다. 그러므로 허신(許愼)의 『설문해자 (說文解字)』에 권도를 ‘반상(反常)’으로 정의되고, 『춘추공양전 (春秋公羊傳)』에 ‘반경(反經)’이라 정의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서 권도는 결코 경상의 도와 대립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권도는 경상의 도가 상황 속에 드러나는 다른 모습이며, 상호 대대적(對待的)인 것이다.
김시습(金時習)은 이런 점을 지적해 “상도(常道)로써 변화에 적용하면 그 변화가 적절하게 되고, 상도로써 변화에 대처하면 그 변화가 고루해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상도와 권도가 상대적인 양상으로 나타난다 해도 상호보완적인 본질을 지닌 것이다.
맹자(孟子)가 “남녀가 물건을 주고받을 때 직접 손을 맞대지 않는 것은 예이고, 형수가 물에 빠졌을 때 손을 잡아서 건져주는 것은 권도이다.”고 하여 예와 권도를 연계시킨 것이나, 이이(李珥)가 “때에 따라 중(中)을 얻는 것을 권도라 하고, 일에 대처해 마땅함을 얻는 것이 의(義)이다.”라고 하여 권도와 의를 관련지은 것도 이런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상도와 권도의 결합은 바로 유학의 시중론(時中論)으로 나타난다. 공자가 “군자가 세상을 살아감에는 절대적인 긍정도 없고 절대적인 부정도 없이 오직 의(義)와 함께 할 뿐이다.”고 한 것이나, 맹자가 공자를 ‘시중의 성인(時中之聖)’으로 보고 공자를 배우겠다고 한 것은, 시중론이 유학의 중심적인 사상임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런데 공자와 맹자의 이러한 시중론은 인간에 대한 진리나 규범의 획일적인 지배와 우위를 부정하고, 오히려 진리와 규범을 능동적으로 살려 나간다고 하는 정신이 터전에 깔려 있다.
즉, 진리의 측면에서 인간이 진리를 넓히는 것이지 진리가 인간을 키워주는 것이 아닌 것처럼, 규범적인 가치에서도 예법과 같은 행동 양식을 인간이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상황에 따라 가치 있는 행위 양식을 창출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시중론이며, 권도가 정당성을 갖는 사상적 터전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권도는 상황에 대한 인간의 주체적인 판단을 전제로 하고, 다시 그것이 정당성을 갖기 위해서는 판단 주체인 인간의 높은 도덕적 인격을 요구하게 된다. 인간은 그가 부닥치는 다양한 상황 때문에 상도의 규범을 적절히 변용한 권도를 행할 수밖에 없지만, 이 경우에도 그 변용의 적절성 여부는 인간의 책임으로 남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권도는 자칫 잘못하면 불의에 빠질 위험과 한계를 갖는다. 『공양전』에서 그러한 점을 지적해 “권도를 행할 때는 방법이 있으니, 남을 죽여서 자신을 살리거나 남을 망하게 하여 자신을 보존하는 행동을 군자는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런 위험과 한계의 본질적인 극복은 오직 완성된 인격에서만 가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권근(權近)은 그 모범을 공자의 『춘추』에서 제시하는데, “춘추의 대용(大用)이 권도이니, 이는 성인의 마음을 근거로 이루어진 것이다.”고 하였다.
김시습도 “상황의 변화에 따른 권도와 불변의 경상을 일치시켜가는 것은 사람에 달려 있지 도(道)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고 하였다. 다만, 실제로 인간이 부닥치는 상황에서의 문제는 아직 미숙한 인간이 어떻게 이 시중의 권도를 창출해가느냐 하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그것은 경상의 도에 대한 확고한 이해와 실천을 통해 특수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주체적 능력으로써 권도를 획득하는 것이다. 김시습은 그것을 지적하여 그 방법으로 『논어』의 충서(忠恕)를 제시한다.
충은 인간자신의 본연의 모습 속에서 모든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음을 믿고 그에 접근하는 것이며, 서는 현실의 미숙함을 인정하고 끊임없는 반성을 통해 다른 사람을 이해해 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