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은(殷)나라의 삼인(三仁)의 하나로 전해내려오는 기자(箕子)가 조선으로 건너와 기자조선을 세웠다는 이른바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에 따라 후대에 추정된 무덤이다.
현재 평안남도 평양시 기림리(箕林里)에 소재하고 있는 정자각(丁字閣)과 중수기적비(重修記蹟碑)를 기자묘로 연결시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상고사연구의 진전으로 기자동래설의 허구성이 드러나 현재로는 후대에 잘못 와전되었거나 조작된 전설로 인정할 뿐이어서 자연히 기자묘문제도 똑같이 취급되고 있는 실정이다.
『고려사』예지(禮志) 잡사조(雜祀條)에는 1102년(숙종 7) 10월 기자를 기념하기 위한 신사(神祠)를 세워 제사(祭祀)를 올리자는 내용의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역시 그 당시에 전설적인 인물로 알려진 기자를 기념하자는 뜻일 뿐 실제로 실존하였다는 의미는 아니라 할 수 있다.
현재의 이른바 기자묘라 불리는 능은 아마 이 때에 건설되었을 것이며 나아가 이러한 능의 존재는 그 때 건설된 기자사당(箕子祠堂)자리를 가지고 후대에 허위축조(虛僞築造)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중국의 사서(史書)인 『사기』송세가(宋世家) 두예조(杜預條)의 주에는 현재의 중국 허난성(河南省)의 양국몽현(梁國蒙縣)에 기자총(箕子塚)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어 기자동래설의 허구성을 뒷받침해주는 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