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은 고려 개국공신 신숭겸(申崇謙)의 묘에서 서쪽으로 100m 떨어져 있으며, 여기서 동남쪽으로 춘천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 2기의 고분은 1981년에 김원룡(金元龍)교수가 발견했고, 1993년에 한림대학교박물관이 발굴하였다. 발견 당시 이미 2기 모두 돌방의 바닥까지 도굴당해 천장부가 완전히 파괴되었고, 고분의 앞에는 천장을 덮었던 대형의 괴석들이 흩어져 있었다.
발굴 결과, 2기 모두 동측에 무덤길[墓道]이 붙은 외칸무덤(單室墓)으로 밝혀졌다. 외부의 봉토는 거의 유실되었다. 천장은 3∼4단의 벽을 쌓아 올리면서 모서리를 죽이고 하나의 큰 판돌을 올려 마무리한 모줄임식[抹角藻井式]을 채용하였다. 두 고분은 서로 동일 능선상에서 약 19m 떨어져 있고, 서측의 무덤이 제1호, 동측의 큰 것이 제2호로 명명되었다.
1호분은 발견 당시 말각조정식 천장부의 북쪽 판석 2매가 제자리에 남아 있었다. 돌방의 크기는 천장부 판석에서 바닥까지가 120㎝, 돌방 바닥이 동서 125㎝, 남북 175㎝이다. 널길[羨道]는 길이가 175㎝, 폭이 60㎝이고, 널길부의 석축 높이는 70∼80㎝이다. 널길부위에 덮개돌이 1개가 남아 있고, 널길 남단 앞에는 널길과 돌방 천장을 덮었던 대형 판석들이 널려 있었다. 시신을 놓기 위한 시상석(屍床石)로 보이는 소형의 납작한 판석이 돌방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시상의 규모와 크기를 알 수는 없었다.
2호분은 1호분과는 달리, 돌방과 널길을 가운데 두고 정사각형모양으로 돌을 둘러쌓아 봉토의 역할을 보강한 독특한 구조이다. 잔존하는 천장석 2매의 바닥면에서 돌방의 바닥까지의 깊이가 134㎝이고, 돌방 바닥은 동서 130㎝, 남북 210㎝이다. 동편 널길은 길이가 230㎝이고, 평균 폭이 60㎝, 널길부 양측 석축의 높이가 110∼130㎝이다.
시상은 돌방 바닥의 서편에 작고 납작한 할석을 깔아서 약 120㎝의 폭으로 하였고, 시상 바깥 부위는 특별한 바닥처리를 하지 않았다. 시상의 규모로 보아 2인을 안치할 수 있으나, 이를 입증할 만한 증거는 없다. 널길을 막는 돌은 길이가 128㎝, 폭이 65㎝의 판석이다. 그 바깥쪽을 커다란 괴석으로 채워서 봉쇄하였다.
1 · 2호분이 말각조정식의 천장구조를 하고 있고, 2호분의 돌방 바닥과 1 · 2호분의 사이, 그리고 1호분 앞에서 흑색과 회색의 연질토기편이 발견되어 양 무덤을 고구려계 돌방무덤으로 보게 되었다.
이러한 독특한 구조를 지닌 고구려계 고분이 북한강 상류에 출현하게 된 사실은 흥미로운 현상이다. 이것은 고구려에서 발생한 돌방형의 기단식 돌무지무덤[積石冢]의 아이디어를, 그들이 한강유역으로 남하하는 과정에서 가지고 내려왔을 것이다. 또한 북한강 상류역의 주민들이 석촌동의 기단식 돌무지무덤의 아이디어를 채용하여, 후대에 전래한 돌방무덤의 축조에 추가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 유적은 고구려 무덤의 후기 양식이 지방화 한 형태이다. 그러므로 춘천 지방이 신라가 북상하기 이전인 6세기 중엽에는 고구려 영역이었음을 보여준다. 고분의 연대는 북한강 상류역을 고구려가 점유한 기간을 고려할 때, 상한은 5세기 중엽, 하한은 6세기 중엽으로 추정 가능하다.
1 · 2호분의 상호관계는 봉토의 층위로 볼 때, 1호분보다 2호분이 먼저 시설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기본형식이 동일한데도 2호분이 1호분보다 규모도 크기 때문에, 1호분의 주인공이 2호분의 주인공보다 권력이 뒤떨어지거나, 일족 가운데 2호분이 주인공의 무덤이라면, 1호분은 뒤에 사망한 그의 가족의 무덤이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