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광산(光山). 일찍이 진사로 출가하여 중이 되어 사람들의 비난을 받았으나, 1405년(태종 5)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가 되었고, 1407년 4월에 인정전(仁政殿)에서 실시하는 친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 봉상시주부(奉常寺注簿)와 집현전직학사(集賢殿直學士)를 지냈다.
1410년 성균주부(成均注簿)로서 진하성절사(進賀聖節使)의 서장관으로 차정(差定)되었으나, 명나라에 가기를 꺼리어 병이 있다고 전(箋)을 올려 사면해주기를 간청하자, 사간원의 탄핵으로 괴주(槐州)에 유배되었다.
1432년 호군(護軍)으로 부회례사(副回禮使)가 되어 회례사 이예(李藝)를 따라 일본을 다녀왔다. 이후 여러 차례 일본을 다녀온 공으로 의복·삿갓·신과 쌀 10석을 하사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평소 변계량(卞季良)과 사이가 좋지 않아 높이 등용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