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2∼1998. 호적상에는 1919년생으로 되어있다. 서울 출생으로 평양고보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1950)하였다. 해방 전 조선연극협회 전속극단에 들어가 무대감독으로 활약했다.
대학시절 고려 예술좌를 창설(1946)하고 자신의 작품세계에 영향을 미친 헨리 입센의 「유령」을 연출, 호평을 받았다. 1951년 미국공보원 영화제작소 수석 시나리오 겸 연출가로 발탁돼 ‘리버티 뉴스’ 등을 제작, 이를 계기로 1955년 최초의 동시녹음 영화 「주검의 상자」로 감독이 되었다.
같은 해 김승호의 첫 주연작 「양산도」에 이어 김지미와 안성기를 배출시킨 「황혼열차」(1957)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1958년 전후 폐허가 된 도시 빈민굴을 배경으로 한 여섯 번째 영화 「초설」과, 남대문 주변의 부랑아 문제를 다룬 「10대의 반항」(1959)을 내놓으면서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남편과 불의의 관계를 맺은 가정부가 단란한 가정을 파멸시키는 「하녀」(1960)를 정점으로 당대의 라이벌 감독인 신상옥·유현목과 함께 한국영화를 주도하는 트리오를 형성하게 된다.
이 작품은 「초설」·「10대의 반항」·「슬픈 목가」(1960)에서 보였던 리얼리즘의 성향을 표현주의로 전환시키는 고비가 되었을 뿐 아니라 이후 「화녀(火女)」(1971)·「충녀(蟲女)」(1972)·「육식동물」(1984)에 이어지는 악녀 연작의 출발점이 된다.
파격적인 상황 설정, 비일상적 대사, 뒤틀린 욕망, 성적 억압에 시달리는 중산층의 심리묘사에 집요하게 매달린 그의 작품은 한운사의 대표적인 라디오 드라마 원작 「현해탄은 알고 있다」(1961), 늙은 부모를 내다버리는 고대 민담을 소재로 한 「고려장(高麗葬)」(1963) 등에 이르러 기괴한 사디즘의 양상을 띤다.
그는 이와 같은 특징을 유지한 채 30여년 동안 「아스팔트」(1964)·「병사는 죽어서 말한다」(1966)·「렌의 애가」(1969)·「파계」(1974)·「육체의 약속」(1975)·「이어도」(1977)·「살인나비를 쫓는 여자」(1979) 등 31편을 내놓았다. 그중 제작을 겸한 감독 작품도 「봉선화」(1956)·「하녀」·「고려장」·「느미」(1979)·「수녀」(1979)·「자유처녀」(1982)·「육식동물」 등 8편에 이른다.
평소 격식을 싫어한 그의 유일한 공직은 말년에 얻은 예술원회원. 1997년엔 ‘김기영 회고전’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열려 외국 영화인들로부터 초현실주의와 심리주의적 영상을 만들어 낸 스타일리스트라는 평가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