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5년(우왕 1) 밀직부사로서 명나라에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파견되었으나 풍랑으로 인하여 돌아와 교동(喬桐)에 머물렀으며, 이듬해 정월 다시 정조사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대묘(大廟)의 제사를 섭행(攝行)하고 존호(尊號)를 올렸다.
1378년 앞서 우왕의 즉위를 알리기 위해 파견되었던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 최원(崔源) 등이 억류되었다가 방환(放還)된 것에 감사하기 위해 판도판서(版圖判書)로서 사은표(謝恩表)를 가지고 명나라에 파견되었다.
그리고 1382년 지밀직(知密直)으로서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김유(金庾), 문하평리(門下評理) 하상재(河尙載), 동지밀직(同知密直) 정몽주(鄭夢周), 밀직부사 이해(李海), 전공판서(典工判書) 배행검(裵行儉) 등과 더불어 명나라에 파견되어 금 100근, 은 1만냥, 포 1만필, 말 1,000필의 세공(歲貢)을 바쳤다.
한편, 김보생이 명나라에 사행하여 빈번한 활동을 보인 시기는 대륙의 정세가 명나라에 유리하게 전개되므로 고려에서는 적극적인 친명외교정책을 추진한 시기이며, 명나라도 고려에 유화적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따라서, 중진인물이 사행을 담당하였으며, 이들은 귀환하여 중용되기도 하였다.
1384년 명에서 5년 세공이 약속과 다르다고 하면서 사신 홍상재(洪尙載)·김보생(金寶生)·이자용(李子庸) 등을 장(杖)을 치고 먼 땅으로 유배 보내었다. 다음해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