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2년 동학에 입도(入道)한 뒤 곧바로 동학 2대 교주인 최시형의 제자가 되어 그를 수행하였다. 1894년 11월 동학운동 2차 봉기에서 동학농민군의 대도소장으로 충청도 보은에서 기병하여 북접(北接)에 가담하였으나, 공주 우금치전투에서 패한 후 최시형의 피신 생활을 함께하였다. 1901년에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경성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1904년 12월에 출옥하였다.
1906년부터 손병희가 창건한 천도교의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1907년 천도교 대도주 자리에 올랐으나 천도교의 요직을 손병희계의 문명파가 장악하자, 1908년에 탈퇴하여 이용구가 조직한 시천교로 이적해서 최고지도자인 대예사(大禮師)에 올랐다.
1912년 이용구가 죽은 후에 송병준이 시천교 운영에 개입하자, 그를 2인자 자리인 종례사에 앉혔다. 1913년 초 결국 송병준에 반발하면서 김연국계인 권병덕이 간부직을 사임하고 낙향하자, 시천교 본부와 결별하고 1913년 3월에 독자적인 시천교총부를 설립하였다.
1920년대에 들어와 계룡산 신도안으로의 이전을 추진하여 1921년에 두마면에 대본원을 건립하고, 1922년에는 남선면에 본교당을 설립하였다. 1924년에 자신의 생일에 맞추어 대본원 낙성식과 함께 신도안으로 이주하였다.
1925년에는 상제교(上帝敎)로 개명하고 『상제교대헌(上帝敎大憲)』을 반포하고는 경성 재동에서 계룡산 상제봉 아래 두마면으로 본부를 옮겼다. 신도안에는 상제교인들의 신앙촌이 만들어졌다. 1937년에 국방헌금 600원을 헌납하였고, 1938년에는 상제교인들이 일본군의 안녕을 빌며 매일 한 숟가락씩 성미를 모았다며 432원 54전을 헌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