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경수(景受). 할아버지는 김숙문(金叔文)이고, 아버지는 감찰 김종(金綜)이며, 어머니는 이양(李樑)의 딸이다. 양사언(楊士彦)·남언경(南彦經)의 문인이다.
1588년(선조 21)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문한관(文翰官)을 거쳐 공조·형조좌랑을 역임하고, 1594년 병조좌랑이 되었으나, 인물됨이 용렬하다는 사헌부의 탄원에 의하여 교체되었다. 이어 북청판관(北靑判官)이 되었으나, 또 적임자가 아니라는 사간원의 반대로 교체되었다.
강원도도사(江原道都事)·어천찰방(魚川察訪) 등을 거쳐 예조좌랑이 되었다가, 1602년 병조정랑이 되었다. 이후 정언(正言)·예조정랑·헌납(獻納) 등을 번갈아 역임하였는데, 이때 사고(史庫)의 정비에 따라 춘추관의 기주관으로 실록편찬사업에도 참여하였다.
이어서 사예(司藝)로 외직에 나가 영해(寧海)·희천(凞川)·삼척(三陟) 등을 다스리다가 1610년(광해군 12) 경직에 돌아왔다. 이듬해에 왕이 사헌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노성지인(老成之人)으로 가자(加資)하였다.
1613년 다시 외직에 나가 금산(錦山)을 맡아 선정을 베풀다가 폐모론이 일어나자 전리(田里)에 은거하였다. 인조반정 뒤 돈녕도정·동지돈녕부사 등에 임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