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광산(光山). 초명은 김종남(金終男). 자는 자시(子始), 호는 요산(樂山). 예조정랑 김석(金磶)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전적(典籍) 김세우(金世愚)이고, 아버지는 영동현감 김표(金彪)이며, 어머니는 감찰 김자위(金自渭)의 딸이다. 아들이 김헌(金憲)이고, 손자가 김우형(金宇亨)이다.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1591년(선조 24) 진사가 되었으며,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생인 김지남(金止男)과 함께 의병으로 활약하였고, 1602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06년 감찰이 된 뒤 공조좌랑과 병조좌랑을 역임하였고, 1610년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617년에는 통례(通禮)가 되었다.
이때 이이첨(李爾瞻) 등에 의하여 폐모론이 대두되자 그에 반대하다가 하옥되어 추국(推鞫: 신문)을 받은 뒤 관직을 떠났으며, 이때부터 이름을 ‘김위남’이라 하였다. 그 뒤 구차스럽게 생을 영위할 수 없음을 주장하며 절식하다가 이듬해 죽었다.
문장은 독창적이었고, 시는 도연명(陶淵明)의 풍격이 있었으며, 필법은 안평대군의 것을 따랐을 뿐만 아니라 그림 또한 뛰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