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은 사야가(沙也加).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선지(善之), 호는 모하당(慕夏堂).
1592년 임진왜란 때 가토[加藤淸正] 휘하의 좌선봉장으로 침입하였다가 경상좌병사 박진(朴晉)에게 귀순하였다.
그 뒤 경주·울산 등지에서 전공을 세워 첨지의 직함을 받았으며, 정유재란 때는 손시로(孫時老) 등 항복한 왜장과 함께 의령전투에 참가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이러한 전공을 가상히 여긴 조정으로부터 가선대부를 제수받고, 이어서 도원수 권율(權慄), 어사 한준겸(韓浚謙) 등의 주청으로 성명을 하사받았으며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승품되었다.
뒤에 야인들의 침입으로 변경이 소란하자 종군을 자원하여 10여 년 동안 방수(防戍: 변방 방위)에 봉직하였으며, 1613년(광해군 5) 정헌대부(正憲大夫)가 되었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 때 그 부장 서아지(徐牙之)를 잡아 죽인 공으로 사패지(賜牌地)를 받았으나 사양하고 수어청의 둔전으로 사용하도록 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는 스스로 광주(廣州)의 쌍령(雙嶺)에 나아가 싸워 큰 전과를 올렸다. 1643년 외괴권관(外怪權管)으로 국경수비를 맡고 있던 중 청나라 칙사의 항의로 해직되어 대구의 녹리(鹿里: 목장을 할 수 있는 땅으로 在野를 의미함)로 돌아왔다.
목사 장춘점(張春點)의 딸과 혼인하여 살면서 가훈·향약 등을 마련하여 향리교화에 힘썼다. 저서로는 1798년(정조 22)에 간행된 『모하당집(慕夏堂集)』 3권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