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사로 재능이 있었으나 서얼 출신이라 벼슬길이 막혀 있었다. 당시 서얼차대에 불만을 품은 명문의 서자들이 당을 무륜당(無倫堂)이라 일컬으며, 소양강가에서 시를 짓고 술마시는 것으로 세월을 보냈다.
이들은 전 정승 박순(朴淳)의 아들 박응서(朴應犀), 목사(牧使) 서익(徐益)의 아들 서양갑(徐羊甲), 심전(沈銓)의 아들 심우영(沈友英), 병사(兵使) 이제신(李濟臣)의 아들 이경준(李耕俊), 박충간(朴忠侃)의 아들 박치인(朴致仁)·박치의(朴致義, 朴致毅라고도 함) 형제이다.
이들은 강변칠우로 자처하면서 죽림칠현(竹林七賢)이라고도 했다. 이들은 모두 서얼로서 처음에는 문예(文藝)를 즐기며 병서를 익혀서 허균(許筠)·이재영(李再榮)·이사호(李士浩) 등과 가까이 지냈다.
김평손은 1608년(선조 41)에 서양갑·심우영·이경준 등과 함께 소를 올려 벼슬길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불만을 품게 된 것으로 보인다. 여강에 굴을 만들어 한 집안에서 생활할 생각으로, 춘천에 곡식을 쌓아 두어 뒷날 병란을 피할 준비까지 했다. 유비(劉備)·관우(關羽)·장비(張飛) 등의 도원(桃園)의 결의를 모방하여, 비밀스런 행적으로 타인들은 이들을 알 수가 없었다.
1613년(광해군 5)에 조령(鳥嶺)에서 서울의 은상인(東萊의 商人이라고도 함)을 죽이고 포도청에 잡혔다. 그런데, 이들은 뜻하지 않은 정쟁에 이용당하고 만다. 즉, 정치적 야망을 가진 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 등이 인목대비(仁穆大妃) 곁에서 권세를 부리는 영창대군(永昌大君)과 김제남(金悌南) 등을 제거하는 데 이용한 것이다.
사형이 확정적인 박응서는 형을 면제해 주겠다는 대북파들의 꾐에 넘어가 김제남 등이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거사자금을 조달하려고 강도짓을 했다고 거짓 자백을 하였다. 이 과정에서 김평손은 거짓 격문을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다. 결국 서얼들의 관료 진출의 좌절에 따른 사회적인 불만을 이이첨 등이 정적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이용한 것이다.
그 결과 영창대군은 강화로 유배되고, 인목대비의 아버지이며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인 김제남은 사형당했다. 이어 기타 소북파가 타격을 입은 계축옥사가 일어났다. 이들 일곱 명은 모두 체포되어 치죄되었다. 그러나 박응서만 용서되고, 박치의는 달아나 행방을 감췄으며, 김평손은 나머지 4인과 함께 사형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