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열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 함창현감과 의금부도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자회(子晦)
주계(朱溪), 해양(海陽)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731년
사망 연도
1803년
본관
안정(安定)
주요 저서
해양시초(海陽詩鈔)
내용 요약

나열은 조선 후기 헌릉참봉으로 시작해 의금부도사·연천현감·함창현감 등을 두루 역임하며 만년까지 관직생활을 지속한 문신이다. 난사(蘭社)라는 시사(詩社)의 동인으로 참여하여 당대 유명 문사들과 폭넓게 교유하는 등 18세기 서울의 문예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저술로는 『해양시초(海陽詩鈔)』가 있다.

정의
조선 후기 함창현감과 의금부도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가계 및 인적 사항

본관은 안정(安定), 자는 자회(子晦), 호는 주계(朱溪) · 해양(海陽)이다. 구포(鷗浦) 나만갑(羅萬甲)의 5대손으로 고조할아버지는 나성한(羅星漢), 증조할아버지는 나석좌(羅碩佐), 할아버지는 선공감 가감역관(繕工監假監役官)을 지낸 나준(羅浚), 아버지는 익위(翊衛)를 지낸 나삼(羅蔘)이다. 증조할아버지 나석좌는 송준길의 문인이었고,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이하곤(李夏坤) · 박필주(朴弼周) 등과 교유하였다. 나열의 집안은 증조할아버지대에서는 서인계에 속하였으며, 노소 분당에 이르러서는 노론계 입장을 견지하였다.

주요 활동

1753년(영조 29) 진사시에 입격한 후 관직에 나아가 헌릉참봉 · 정릉참봉 · 동몽교관 · 의금부도사 · 연천현감 · 함창현감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791년(정조 15) 함창현감 재직 당시 선현 배향과 관련한 유생 상소를 금단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직을 당하였으나 이듬해 주1되었고, 이후 주2 등을 역임하며 만년까지 관직 생활을 지속하였다.

젊은 시절 송재도(宋載道)의 주도로 결성된 난사(蘭社)라는 주3의 동인으로 참여하였으며, 시사의 구성원이었던 홍양호(洪良浩) · 신광하(申光河) · 홍상철(洪相喆) · 홍경후(洪景厚) · 성대중(成大中) 등 당대 문사들과 교류하였다.

또한, 박지원(朴趾源) · 이한진(李漢鎭) · 이덕무(李德懋) · 이광려(李匡呂) 등 노 · 소론계 및 서얼과도 교유하며, 폭넓은 문예 활동을 영위하였다. 특히 성대중과 절친하게 지내면서 자식들까지 교유를 이어갔는데, 이로 인해 성대중과 그 아들 성해응(成海應)의 문집에 나열과 관련한 기록들이 많이 보인다.

학문과 저술

저술로는 『해양시초(海陽詩鈔)』 1책이 전하는데, 필사본 형태로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책은 나열이 지은 모든 시가 수록된 것은 아니고, 제목이 보여주는 것처럼 그의 시 가운데 만년의 작품들을 뽑아 1책으로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이규상(李奎象)은 『병세재언록(幷世才彦錄)』에서 나열이 동생 나걸(羅杰)과 함께 시적 재능으로 명성이 있었고, 둘 다 글씨를 잘 썼다고 평가하였으며, 오세창(吳世昌)『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서 나열이 왕희지를 배워서 글씨가 기이하고 강건하다고 평가하였다.

참고문헌

원전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
『병세재언록(幷世才彦錄)』.
『승정원일기』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해양시초((海陽詩鈔))』

논문

진재교, 「해양 나열의 문예활동과 시세계」(『한문학보』 18, 우리한문학회, 2008)
주석
주1

죄를 지어 면관(免官)되었던 사람을 다시 벼슬자리에 등용함.    우리말샘

주2

조선시대, 세자익위사(世子翊衞司)의 종6품 벼슬. 좌위솔(左衞率)·우위솔(右衞率)이 있었다.

주3

시인들이 조직한 문학적 단체.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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