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백원(百源), 호는 삼명(三溟). 대사성을 지낸 강석빈(姜碩賓)의 고손자이다. 증조할아버지 강학(姜㰒)과 할아버지 강필득(姜必得)은 관직의 이력이 없고, 아버지 강세정(姜世靖)은 회덕현감을 지냈다. 모친은 안동권씨 권세억(權世檍)의 딸이며, 부인은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지낸 안동권씨 권빈(權儐)의 딸이다.
1794년(정조 18) 정시에서 병과로 급제해 정언 · 지평 · 부수찬 · 동몽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1805년(순조 5)에는 정순왕후(貞純王后)의 죽음을 알리는 고부사(告訃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17년(순조 17) 이후로 약 10년 동안 관직에서 물러나 있다가 다시 복직했는데, 당시 대리청정(代理聽政)을 하던 효명세자(孝明世子)와 사이가 각별하였다. 1830년(순조 30) 효명세자가 세상을 떠나자 관직에서 물러났고, 1832년 아들 강시영(姜時永)의 임지인 은율에 갔다가 이듬해 생을 마감했다. 공서파(攻西派)의 대표적 인물이 되어 채제공(蔡濟恭)을 비판하고 정약용(丁若鏞)의 해배(解配)를 반대하는 등 남인 시파(時派)와 적극 대립하였다.
시문에 조예가 깊어 당대 문인들이 높이 평가하였다. 목만중(睦萬中)은 그의 시문이 경지에 이르렀다고 인정하며 자신의 묘문(墓文)을 부탁했고, 신위(申緯) 또한 그가 시학에 대한 감수성이 남다른 것을 칭찬하였다. 고부사(告訃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연경에 갔을 때는 옹방강(翁方綱)의 제자로 조선 시인들과 교분이 깊었고 시로 명성이 높았던 오숭량(吳崇梁)도 그의 시를 높이 평가하였다.
저술로는 『삼명집(三溟集)』과 『삼명시화(三溟詩話)』가 있다. 『삼명집』은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삼명시집』과 『동국선현전(東國先賢傳)』을 합본해 후손들이 영인 간행한 것이고, 『삼명시화』는 개인 소장본으로 미정리 초고 상태로 전한다. 『삼명시화』에는 최치원(崔致遠)부터 조수삼(趙秀三)까지 100여 명의 시인을 대상으로 127편의 시화(詩話)가 수록되어 있는데, 대부분 18세기 이후에 해당하는 시화가 주종을 이룬다. 주로 남인계 시인들을 중심에 두면서도 노론(老論)이나 소북(小北) 그리고 중인(中人)과 서인(庶人)의 시까지 아우르고 있어 18세기 한시사(漢詩史)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