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중휘(仲輝), 호는 의졸(宜拙). 좌의정 남지(南智)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남타(南柁)이고, 아버지는 평강현감 남식(南烒)이며, 어머니는 서주(徐澍)의 딸이다.
1657년(효종 8) 사마시에 합격, 내시교관(內侍敎官)이 되었고, 1662년(현종 3)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 지평·교리를 역임하고 북도평사(北道評事)로 나갔다가 1674년 예조참의를 거쳐 대사간이 되었다.
1675년(숙종 1) 인조의 계비이던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가 일어나서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 중도부처(中途付處)되자 남인 권대운(權大運)을 규탄하고 김수항을 변호하는 상소문을 올렸다가 진도에 유배되었으며 배천(白川)으로 이배되었다.
1678년 풀려나 1680년 좌부승지에 이어 대사성이 되었는데, 이때 대동법의 폐단을 지적한 시무소를 올렸다. 홍문관부제학을 거쳐 예조참판에 재직하면서 동지 겸 사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와 예조판서를 지냈다.
일찍부터 재간과 명성이 있었으며, 조정에서 국사를 의논할 때에는 항상 관대하고 공평하였으며, 시비와 사정(邪正)을 변론하는 데 의연한 태도를 취하였다고 한다. 문장에도 능하여 왕명을 받들어 어록(語錄)을 교정 또는 교열하여 『어록해(語錄解)』를 찬하여 1669년 현종에게 진정하였다. 시호는 장간(章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