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권 31책. 필사본.
서문에 의하면 이 책을 편찬한 이선시(李善始)는 조선시대 당론이 일어난 이후 공정한 시비가 없어졌음을 병통으로 여겼다고 한다. 그래서 공찬(公纂)·사찬(私纂)의 서적들에서 자료를 폭넓게 수집해 피차의 구별없이 선·악을 모두 기록하였다고 한다.
정확한 편찬 시기는 알 수 없다. 단, 인용 서목 중 ≪국조보감 國朝寶鑑≫에 관한 협주(夾註)에서, 추존되기 이전 정조의 묘호(廟號)인 정종(正宗)의 명칭이 보여 순조 이후 고종 광무(光武) 3년 이전으로 추정할 수 있다. ≪장서각도서목록≫에서 영조 연간 필사로 추정한 것은 수록 내용 시기에서 오도된 듯하다.
권두에 최정진(崔廷鎭)의 서문 및 인용 서목이 실려 있다. 특히, 인용 서목으로 공간류(公刊類) 71종과 제가(諸家)의 소설(小說)·잡기(雜記)·장(狀)·전(傳)·지(誌)·보(譜) 등 사찬류 170종을 언급해 역사 기술의 공적인 태도를 엿보게 한다.
권1의 내용은 명종 19∼선조 5년(1572)으로 심의겸(沈義謙)·김효원(金孝元)의 붕당, 조식(曺植)의 죽음 등을, 권2∼4는 선조 5∼25년으로 종계변무사주청사(宗系辨誣事奏請使) 황정욱(黃廷彧)의 개종계득청(改宗系得請)과 토정여립(討鄭汝立)의 공신 책봉 등을 기록하였다.
권5는 선조 25∼27년으로 명나라 군의 원병, 선조의 비망기(備忘記) 등을, 권6·7은 광해조 때 곽재우(郭再祐)의 상소와 비답,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죽음 등을, 권8·9는 현종 1(1660)∼2년과 현종 11∼14년 때의 복상(服喪)에 관한 2차의 예송(禮訟) 등을 기록하였다.
권10∼20은 숙종조 송시열(宋時烈)의 탄핵, 허목(許穆)의 환직·전유(傳諭)·옥사(獄事), 김장생(金長生)의 문묘종사(文廟從祀) 등을, 권21∼26은 경종 때의 건저(建儲)의 소청(疏請)과 연잉군(延礽君)의 세제(世弟) 책봉, 노론사대신(老論四大臣)의 탄핵, 윤선거(尹宣擧)·윤증(尹拯)의 관직·시호 환원 등을 기록하였다.
권27∼31은 영조 1(1725)∼35년으로 신임(辛壬) 후의 피적자(被謫者) 석방, 유봉휘(柳鳳輝)의 추증과 반대상소, 왕세자의 흉서(薨逝), 경외호구(京外戶口) 조사와 공인사화의 민폐 지적, 객성(客星)의 출현 등을 기록하였다.
이 책은 조선시대 역대 조정의 기사 중 특정 왕의 중요 사건을 중점적으로 다루어 편년체의 형식에다 기사본말체의 성격을 가미하였다.
그러나 기록 해당 시기 머리에 천문(天文)의 변화를 기록했으며, 인용문 말미에 자료의 출처를 충실하게 밝혔다. 특히, 당론에 의해 시비가 복잡한 문제에 대해서는 양측의 기록물을 공평하게 채록하였다.
또한, 야담에 가까운 자료도 인용하였다. 예를 들면 지은이가 모호한 ≪야담 野譚≫이라는 책에서 광해조에 관한 총평을 인용하며 “광해의 처음 정치는 선조의 말년보다 낫다.” 또는 “광해의 한 궁인(宮人)은 풍년이 광해의 원수라고 하였다.”라고 하여 폭넓은 자료 선택의 입장을 보였다.
한편, 중국의 것으로 1180년 여조겸(呂祖謙)이 편찬하고, 1786년 교간(校刊)된 27권 8책으로 된 흠정사고전서(欽定四庫全書)의 ≪대사기 大事記≫가 장서각도서에 있어 주목된다.
이 책은 인용 자료에 근거해 주(周)나라 경왕 39년(서기전 481)에서 한(漢)나라 무제 정화(征和) 3년(서기전 90)까지의 중요 사적을 편수하였다. 그리고 <통석 通釋> 3권과 <해제 解題> 12권을 통하여 편저자의 역사의식을 피력하였다.
이 책과 비교해볼 때 우리 나라의 ≪대사기≫는 편자의 역사의식을 직접적으로 나타내는 작업이 생략되었다. 그러나 중요 사적을 발췌, 수록하는 부분이 광범위한 자료 선택으로 늘어난 셈이어서 조선조에서 시비가 엇갈렸던 사적을 연구하기 위한 자료집 구실을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