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천동고분군은 1981년 6월 9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부산지역의 대표적인 삼국시대 고분군으로 3세기대에서 7세기대까지 조영되었으며 4∼5세기가 그 중심연대이다. 대규모의 고분군이 복천동 일대 대포산의 중앙부에서 서남쪽으로 뻗어나온 그리 높지 않은 구릉 위에 밀집 분포되어 있다. 이 고분군은 1969년 9월부터 1994년에 이르기까지 6차례에 걸쳐 동아대학교와 부산대학교박물관 및 부산시립박물관에 의해 발굴되었다.
조사 결과 복천동고분군은 복천동 일대 지배집단의 묘역임이 확인되었고 무덤의 형식은 1981년까지 발굴된 40기의 고분 가운데 소형 덧널무덤〔土壙木槨墓〕8기, 딸린덧널〔副槨〕이 있는 대형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墓〕1기, 딸린덧널이 있는 대형 구덩식돌방무덤〔竪穴式石室墓〕4기, 딸린덧널이 없는 대형 구덩식돌방무덤 4기, 소형 구덩식돌덧널무덤〔竪穴式石槨墓〕18기 등으로 다양하였다.
소형 덧널무덤은 길이 330∼410㎝, 너비 160∼210㎝ 정도이며, 내부에는 덧널을 설치하였고 바닥에 주검받침〔屍床〕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두 종류가 있다.
딸린덧널을 가진 고분은 모두 대형분으로 남쪽에 으뜸덧널이, 북쪽에 딸린덧널이 50∼60㎝ 간격으로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으뜸덧널이 대형의 덧널무덤 및 구덩식 돌방무덤인 경우에는 딸린덧널이 모두 대형 덧널무덤이고, 대형 돌무지덧널무덤인 경우는 딸린덧널 역시 같은 돌무지덧널무덤이었다.
대개 무덤구덩이〔墓壙〕의 크기는 으뜸덧널은 길이 550∼450㎝ 내외, 깊이 2∼3m 내외이며, 딸린덧널은 길이 4∼6m, 너비 250∼450㎝, 깊이 2∼3m 내외이다. 무덤구덩이 내부에는 으뜸덧널의 경우 덧널 혹은 돌방을, 모든 딸린덧널에는 덧널을 각각 설치하였다. 구덩이가 깊기 때문에 유구(遺構)가 지하 깊숙히 설치된 것이 특징적이다.
딸린덧널이 없는 대형 구덩식돌방무덤은 길이 약 7m, 너비 150㎝이며, 소형 구덩식돌덧널무덤은 길이 2∼4m, 너비 1m 내외이다. 이들은 딸린덧널이 있는 돌방무덤에 비해 길이가 아주 길며 뚜껑돌이 거의 지상에 노출될 정도로 무덤구덩이가 얕은 것이 특징적이다.
이러한 고분들 중에서 큰 것은 구릉의 중심부에, 작은 것은 구릉 주변지역에 주로 분포되어 있다. 중심부의 대형고분은 구릉 남쪽에서 북쪽으로 가면서 순차적으로 정연하게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분의 장축은 대부분이 구릉의 방향과 일치하는 남북향이고 머리의 방향은 남향이다. 일부 대형고분의 으뜸·딸린덧널 내에는 적어도 3인 이상의 순장자(殉葬者)가 같이 매장된 것으로 보인다. 이 고분군에는 도굴되지 않은 큰 무덤이 많아 2,000여 점 이상의 비교적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토기류는 굽다리접시〔高杯〕, 긴목항아리〔長頸壺〕, 바리모양그릇받침〔鉢形器臺〕, 원통모양그릇받침〔圓筒形器臺〕, 토제등잔(土製燈盞), 마두식뿔잔〔馬頭飾角杯〕, 소형광구원저장경호(小形廣口圓底長頸壺), 광구소호(廣口小壺), 오리토기, 그릇받침〔器臺〕, 손잡이달린작은항아리〔把手附小壺〕, 손잡이달린굽다리주발〔把手附臺附盌〕, 항아리〔壺〕등이 있다.
철제공구류는 도끼·손칼·끌·낫·철사(鐵絲)·찍개·망치·따비·보습 등이 있다. 무기류로는 화살촉·창·고리자루큰칼〔環頭大刀〕·유자이기(有刺利器)·화살통금구〔胡錄金具〕 등이 있다. 무장구(武裝具)로는 판갑옷〔板甲〕·비늘갑옷〔札甲〕등의 갑옷·투구·말투구 등이 있다. 마구류(馬具類)로는 말안장·발걸이〔鐙子〕·재갈〔銜〕·말띠드리개〔杏葉〕·말종방울·띠고리〔鉸具〕등이 있다.
그밖에 중요 유물로서 ‘출(出)’자형의 금동관·금제귀걸이·곱은옥〔曲玉〕·유리옥제목걸이·은제팔찌 등의 장신구류와 청동제칠두령(靑銅製七頭鈴)·꺾쇠·덩이쇠〔鐵鋌〕 등도 출토되었다. 이 유물들 중 특히 주목되는 것은 토기류·갑옷과 투구류·마구류, 그리고 덩이쇠이다.
토기류에는 4∼5세기대에 속하는 낙동강 하류지역의 특징적인 토기가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그 결과 이 지역 토기의 세부적인 편년이 어느 정도 가능해졌으며, 또 5세기 중엽경으로 추정되는 토기에는 경주지역 토기의 영향이 강하게 반영되었다는 사실도 확인되었다.
갑옷과 투구류는 철제판갑옷 2벌, 철제투구〔鐵製胄〕5점, 철제괘갑(鐵製卦甲) 1벌, 철제경갑(鐵製頸甲) 1쌍 외에 괘갑 및 마갑(馬甲)일 것으로 추정되는 미늘〔小札〕등 여러 종류가 많이 발견되었다.
판갑옷은 장방형 철판을 세로로 잇대어 쇠못으로 이어붙인 것(제10호분 출토)과 삼각형 철판을 가죽끈으로 이어붙인 것(제4호분 출토)의 두 종류가 각 1점씩 출토되었다. 제10호분 출토 판갑옷은 목가리개가 부착되어 있는 특이한 형식이다. 이와 비슷한 것이 김해지방에서 1점 발견된 바 있다. 삼각형 철판을 가죽끈으로 이어 붙여 만든 제4호분 판갑옷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견된 유일한 것이다.
투구는 모두 몽고바리모양〔蒙古鉢形〕이다. 1980년 발굴된 복천동 제10·11·21호분에서 각 1점, 1974년 발굴된 복천동 학소대 1구 제3호분에서 2점이 출토되었다. 이 중 제10호분 출토 1점만 복발(伏鉢)이 없고 나머지는 모두 투구 꼭대기에 복발이 덮여 있는 전형적인 형태이다. 투구는 딸린덧널이 있는 대형분에서만 출토되는데, 으뜸덧널의 형식이 모두 재래적인 덧널무덤이 아닌 구덩식돌방무덤 혹은 돌무지덧널무덤으로 한정되어 있다.
괘갑과 경갑은 소형 덧널무덤에서부터 대형 무덤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많이 출토되었다. 특히, 제11호분에서 출토된 괘갑은 경갑·견갑(肩甲)·경갑(脛甲) 등의 부속구까지 완전히 갖추어진 1벌이었다. 이와 같이, 괘갑 실물 1벌이 완전히 갖추어진 상태로 발견된 예도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이다.
말투구는 제11호분의 딸린덧널인 제10호분에서 마구류 1벌과 함께 출토되었다. 얇은 철판을 쇠못으로 이어 붙여 만든 것이다. 얼굴덮개부·챙·볼가리개가 완전히 갖추어진 것으로 크기와 형태로 보아 실전용임이 확실한데, 실물로는 우리 나라에서 처음 발견된 것이다. 최근 합천 옥전고분(玉田古墳)에서 2점이 새롭게 조사되었고, 일본에서도 와카야마현〔和歌山縣〕의 오타니고분〔大谷古墳〕에서 출토된 것 1점뿐이다.
이상의 갑옷·투구류 중 판갑옷을 제외한 괘갑·몽고바리모양투구·경갑·말투구 등은 고구려의 여러 고분벽화에 정밀하게 그려져 있는 것과 같은 점으로 보아 모두 고구려계의 무장구임을 알 수 있다. 그 밖에 발걸이와 재갈 등의 마구류도 고구려와 관계가 깊은 것들이다.
복천동고분은 출토된 유물의 성격으로 미루어보아 4세기대에서 5세기대까지 계속해서 축조된 유적이다. 그러나 4세기대의 고분은 아직 많이 조사되지 않아 불확실한 점이 많다. 반면, 5세기대의 것은 고분의 종류도 다양하고 유형별 묘제의 변화도 비교적 정연하게 나타나 있다.
대개 4세기에서 5세기 전반까지는 소형 덧널무덤과 딸린덧널이 있는 대형 덧널무덤이 유행한다. 5세기 중엽경부터 딸린덧널이 있는 대형 덧널무덤의 주광에 덧널 대신 돌방이 설치되는 새로운 형식의 묘제가 등장한다. 이것은 이 지방의 전통적인 묘제인 덧널무덤과 새로운 묘제인 구덩식돌방무덤이 결합하는 과도기적인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 이와 함께 경주계 무덤인 돌무지덧널무덤도 부분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아직 덧널무덤적인 요소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고 하겠다. 그 뒤 5세기 후엽이 되면 덧널무덤 혹은 그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는 무덤은 소멸되고, 그 대신에 딸린덧널이 없는 긴 장방형의 크고 작은 돌방 및 돌덧널무덤이 새로운 묘제로서 채용되었다.
이러한 묘제의 변화는 껴묻거리에서도 잘 반영되고 있다. 즉, 널무덤이 주된 묘제로 이용되던 초기단계에는 이 지역의 특징적인 토기가 유행하였다. 그러나 5세기 중엽경 덧널무덤과 구덩식돌방무덤이 결합된 새로운 형식의 묘제가 등장하면서부터 경주계 토기가 나타나기 시작하고, 이후부터 이 지방 특유의 재래토기가 점점 소멸되어갔다.
또한 이러한 변화와 함께 이곳에서 갑옷과 투구류가 크게 유행하였고 동시에 마구류도 더욱 발달하였다. 그 뒤 5세기 후엽이 되면 구덩식돌방무덤이 일반화되고 토기류도 거의 완전히 경주토기화하였다.
이 고분군에서는 많은 양의 덩이쇠가 주로 4세기 전반대에서 6세기대에 걸쳐 축조된 대형묘에서 출토되었는데 으뜸덧널의 바닥에 1∼3열씩 깔아 널받침의 역할을 했음이 확인되었다.
복천동고분군은 우리나라 고대사 해명에 필요한 여러가지 자료를 풍부하게 제공하고 있는 유적이다. 묘제상으로는 국내에서 처음 발견된 새로운 묘제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다양한 묘제가 확인되어 이 지역 묘제의 변천과 그 계보연구에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이 고분군에서 출토된 갑옷·투구류와 마구류는 단일 고분군으로서 가장 많은 출토량을 보였다. 또한 고구려계 영향으로 생각되는 유물과 이 지역 특유의 토기와 함께 신라계 토기가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이를 통해, 4∼5세기대의 가야와 신라사 복원은 물론, 당시의 국내외 관계사의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