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사록 ()

조선시대사
문헌
1597년 정유재란 때 왜인에게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간 정경득(鄭慶得)의 일본 풍토기(風土記)를 1902년에 발간한 책이다.
목차
정의
1597년 정유재란 때 왜인에게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간 정경득(鄭慶得)의 일본 풍토기(風土記)를 1902년에 발간한 책이다.
내용

저자가 1597년 8월부터 1599년 7월까지 2년 동안 일본에서 생활했던 것을 기록한 것이다. 저자는 찰방 함일(咸一)의 아들로, 전라남도 함평군 월야면에서 태어났다. 저자는 어려서부터 영특한 자질로 특히 경서에 몰두하였다.

정유재란 때 부친을 따라 난을 피해 서해안 칠산(七山) 바다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때 갑자기 왜의 수군을 만나자 어머니 이씨, 부인 박씨, 제수 이씨, 아직 출가하지 않은 여동생 등 4부녀는 바다에 뛰어들어 만약의 재앙에 대처하였다.

다만, 늙은 부친과 어린아이들을 제외한 저자와 동생 희득(希得) 등은 일본에 압송되어 아파주(阿波州)의 왜군 진영에 이르렀다.

이 두 형제는 온갖 위협에도 불구하고 망궐(望闕)·망향(望鄕)·망해(望海)라는 세 단(壇)을 만들어놓고 초하루와 보름이면 나라와 부모에 대한 지극한 정성을 다하였다. 한편, 현소(玄蘇) 등 학문에 뜻을 둔 사람에게는 경전의 뜻을 설명하기도 하고 시를 주고받기도 하였다. 이런 저자의 문장과 절의에 감복한 왜인들은 이들을 ‘족하(足下)’니, ‘가객(佳客)’이니 하여 존경을 표시하였을 뿐 아니라 1598년 11월에는 배를 주어 귀국하게 해주었다.

귀국 후 부친의 뜻에 따라 향시(鄕試)에 세 번이나 장원하였다. 그러나 1618년(광해군 10) 무오정란이 있자 벼슬의 뜻을 버리고 임천에서 책을 벗하고 일생을 마쳤다.

일기체로 이루어진 이 책은 권두에 피란 생활을 할 때와 포로가 되었을 때, 그리고 귀국할 때 함께 했던 사람의 명단이 있고 자서(自敍)와 최익현(崔益鉉)의 서문이 있다. 일기의 내용에는 풍토기 이외에도 당시 많은 포로들의 생활상이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권말에는 ‘일본풍토기’라는 제목 하에 일본의 지리 및 풍속, 임진·정유 왜란에 참여한 왜군의 숫자와 장수 명단이 적혀 있다. 또한 4부녀가 바다에 투신한 일에 대해 1681년에 정려문(旌閭門)을 짓게 하고 ≪삼강록 三綱錄≫에 싣도록 한 예조(禮曹)의 완문(完文)이 실려 있다.

의의와 평가

1902년에 초간, 1965년에 중간했으며, 1986년에 국역, 간행하였다. 당시 기록으로는 아우 희득의 ≪월봉해상록 月峰海上錄≫이 있는데 이 책에 비해 내용이 자세하다.

참고문헌

『국역 해행총재』 Ⅷ(민족문화추진회, 1977)
『국역 만사록』(함평군향토문화연구회, 1986)
집필자
김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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