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어(北魚)라고도 하며, 학명은 Theragra chalcogramma (PALLAS)이다. 몸빛은 등쪽이 갈색이고 배쪽은 백색이다. 옆구리에 두 줄의 점선과 같은 혹갈색 가로띠가 있으며, 몸은 작은 둥근 비늘로 덮여 있다. 아래턱에 아주 짧은 수염이 있다.
일견 대구와 유사하나 대구에 비하여 세장(細長)한 점, 아래턱이 위턱보다 약간 긴 점, 꼬리지느러미가 두 갈래로 째진 점 등이 대구와 다르다. 수명은 8년 이상인데 8년생의 전장(全長)이 60㎝ 가량이다. 한류성 물고기로서 경상북도 이북의 동해안에 널리 분포하나, 함경남도 연안에서 가장 많이 잡힌다.
명태는 지방, 크기, 내유(來游) 시기, 어획 방법 등등에 따라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고 있으나 가장 흔하게 불리는 이명(異名)은 북어(北魚)이다. 명태는 한자로 명태(明太)라고 쓰는데, 이름의 유래에 관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이유원(李裕元)의 ≪임하필기 林下筆記≫에서는 “명천(明川)에 태(太)가라는 성을 지닌 어부가 있었는데 어떤 물고기를 낚아 주방 일을 맡아보는 관리로 하여금 도백(道伯)에게 바치게 하였던바, 도백이 이를 아주 맛있게 먹고 그 이름을 물으니 모두 알지 못하였다. 다만 이 물고기는 태가라는 어부가 잡은 것이니 도백이 이를 명태(明太)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이로부터 이 물고기가 아주 많이 잡혀 전국에 넘쳤고 이를 북어라고 부르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명태는 산지인 명천의 명자와 어획한 어주의 성인 태자를 따서 명명한 것이다. 이와 유사한 전설은 다른 문헌들에도 보인다. 북어라는 이름에 대해서는 이만영(李晩永)의 ≪재물보 才物譜≫에 북해(北海)에서 나기 때문에 북어라 한다고 하였다.
명태 또는 북어라는 이름은 조선 초기까지만 하더라도 문헌에 전혀 보이지 않고,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함경도 경성(鏡城)과 명천의 토산조 신증(新增)부에 비로소 명태로 추정되는 무태어(無泰魚)라는 어명(魚名)이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이 명태가 조선 초기의 문헌에 보이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무명(無名)의 물고기는 먹어서 안 된다는 미신 때문에 명태를 먹지도 잡지도 않다가 이름이 붙은 이후부터는 많이 잡았다는 설과, 또 명태를 대구와 동일시하였으리라는 추측도 있다.
명태 어업이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 후기부터였으며, 명태라는 명칭이 널리 통용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효종 3년(1652)의 기록에 명태라는 이름이 보인다. 강원도에서 진상하는 대구 어란에 명태 어란이 첨입(添入)되어 있어 문제로 삼았는데 이 때 명태라는 이름이 사용되고 있다.
이 무렵에는 명태라는 이름이 널리 사용되고 있었던 것 같으며, 잡히기도 많이 잡혀 명태 어란은 귀하지 않은 식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9세기에 있어서는 명태 어업이 가장 중요한 어업의 하나로 등장하고 있었음이 확증된다.
서유구(徐有榘)의 ≪난호어목지 蘭湖漁牧志≫에는 명태를 한자로 명태어(明鮐魚)라고 쓰고 속칭 생것은 명태, 말린 것은 북어라고 한다고 하고, 명태가 다산하여 전국에 넘쳐 흐르며 우리 나라 수산물 중에서 명태는 청어와 더불어 가장 많이 나는 것이라고 하였다.
명태의 자원이 아주 풍부하였고, 우리 나라 사람이 이를 아주 좋아했기 때문에 명태 어업이 대성황을 이루었던 것이다. 한말에 일본인들이 저술한 각종 서적에도 당시 명태 자원이 놀라울 만큼 풍부하였음을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다.
어구는 자망(刺網)과 연승(延繩)을 주로 사용하였는데 풍어시에는 하루 아침에 10타(駄:1타는 2,000미)를 어획하는 수도 있다고 하였다.
명태는 동건품(凍乾品:얼려서 말리는 물품)으로 가공되어 널리 유통되었으며 관혼상제(冠婚喪祭)에 있어서는 빼놓을 수 없는 필수식품이었다. 겨울이 성어기인 명태를 얼려서 말리는 우리 나라 특유의 가공법인 동건법을 사용하여 저장 가능한 제품을 대량으로 만들었는데, 이러한 가공법의 개발이 명태의 대량어획을 가능하게 하였던 것이다.
명태의 어란은 일찍부터 명란(明卵)으로, 명태의 창자는 창난젓으로 가공하여 소비하였고, 간장은 어유(魚油)를 만들었다. 이것이 간유의 주원료가 되는 것은 주지하는 바다. 명태는 버릴 것이 없이 모두 이용되는 중요 물고기인 것이다. 일제시대에 있어서 명태는 가장 많이 생산되는 물고기의 하나였다.
명태 어획이 최고기록을 세웠던 1940년에 있어서의 어획량은 27만M/T 이상이었다. 이는 당시의 총어획량의 약 16%를 차지하는 것이었다. 당시의 주요 어구는 기선저인망(機船底引網)과 자망이었다.
전자는 규모가 크고 능률적인 어구였는데 그 허가가 일본인에게 편중적으로 부여되었고 이 어업을 경영한 일본인들은 막대한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광복 이후에는 국토의 분단으로 주어장이 떨어져 나가게 되었으므로 명태어업은 큰 타격을 받았다. 광복 이후 수년간에 걸쳐서 명태 어획량은 불과 1만 여M/T 수준에 머물고 있었다.
그 이후 점차 증대되어 1980년대에는 연간 10만M/T을 초과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어획량이 증가하였던 것은 과거에는 어획이 금지되어 있었던 ‘노가리’라는 명태새끼를 무차별 어획하였기 때문이며, 최근에는 어획량이 감소하여 1997년에는 6,373M/T를 잡는 데 그쳤다.
1960년대에 북태평양의 명태어장을 개척한 이후 어획량이 급속도로 증가하였다. 1970년에 1만 2708M/T에 불과하던 명태 어획량이 1976년에는 44만 4516M/T이나 어획되어 경이적인 어획량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1977년부터 미국과 소련이 200해리 경제수역을 설정하여 우리 나라 어선의 어획을 규제함에 따라 명태 어획량은 급속히 감소하여, 1986년에 해외어장에서 잡은 명태의 총어획량은 21만 5814M/T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