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의 불탑(佛塔, Stūpa)은 석재를 가공하여 축조한 모전(模塼) 형식과 벽돌을 구워 조성한 전탑(塼塔) 형식으로 나뉜다. 그러나 모전석탑과 전탑은 같은 시기에 함께 건립되었기 때문에 선후 관계를 구분할 수 없다. 모전석탑은 신라의 전형양식(典型樣式) 석탑과 전탑(塼塔)의 특징이 함께 반영된 석탑이다. 전탑은 재료를 기준으로 구분한 것이지만 모전석탑은 벽돌을 모방한 석탑이라는 점과 옥개석(屋蓋石)과 탑신의 축조 형식 차이를 기준으로 나눈 것이다. 따라서 모전탑에는 재료의 모방과 전탑 양식의 모방이라는 2가지 의미가 함께 들어 있다. 인도 불탑의 시원으로 인정받는 산치 스투파는 모전석(模塼石)을 이용한 석탑인데, 벽돌과 석재를 이용한 불탑이 동시에 건립되었기 때문에 별도로 모전석탑으로 분류하지는 않는다.
우리나라 모전석탑에 대한 연구는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일본인 학자들은 벽돌 형태로 가공한 석재로 축조한 석탑의 기원을 중국의 전탑에서 찾았다. 이후 모전(模塼)이라는 의미는 이후 중국의 전탑을 모방했다는 전제를 가지게 되었으며, 최근까지도 모전석탑은 전탑을 모방한 것이라는 학설이 지배적이다. 고유섭(高裕燮)은 분황사 석탑에 대해 재료는 석재라도 수법과 양식이 전부 전탑의 형태를 따르고 있어 의전탑(疑塼塔)이라로 칭했다. 의전이라는 개념은 전탑을 전제로 한 것으로 모전석탑이라는 명칭은 이때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우리나라의 전탑과 모전석탑은 고려시대에 건립된 경기도 여주 신륵사와 정선 수마노탑(水瑪瑙塔)을 제외하면 경상북도 경주와 안동 등 경상도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발해는 고구려의 문화를 계승했는데, 묘탑(墓塔)으로 건립된 3기의 전탑이 알려져 있다. 이 중 현존하는 것은 중국 백산시(白山市) 장백현(長白縣) 탑산(塔山)의 영광탑(靈光塔)이다. 영광탑은 상륜부를 포함한 높이가 약 12.31m이며, 정방형(正方形) 평면의 5층으로 건립되었다. 이 탑은 중국 전탑과 신라 전탑의 특징을 모두 가지고 있다. 옥개석의 상면을 계단식으로 구성하는 방식은 중국 전탑의 처마 부분의 보편적 특징으로 목조 건축의 공포(栱包)를 간략하게 만든 것이다. 영광탑의 각 층에는 감실(龕室)을 조성했는데 안동 법흥사지 7층 전탑의 감실 천장과 유사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탑지(塔誌)만 남아 있는 것으로는 마적달탑(馬滴疸塔)과 정효공주(貞孝公主) 묘탑이 있다. 마적달탑은 『옥춘현지(琿春縣志)』의 기록에 따르면 7층 높이의 전탑이었는데, 1921년에 무너졌다고 한다. 길림성(吉林省) 정효공주(貞孝公主) 묘탑은 탑이 세워졌던 지하에 묘만 남아 있다. 정효공주 묘탑은 층수를 알 수 없지만, 묘의 면적이 5.65x5.50m로 마적달탑보다 넓어 7층 이상의 규모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정황으로 보아 고구려와 신라 모두 7세기를 전후해 전탑과 모전석탑을 동시에 건립했음을 알 수 있다.
모전석탑의 양식은 석재를 벽돌 형태로 가공해 축조한 방식과 전형양식 석탑에서 탑신부 우주를 생략하고 옥개석 낙수면(落水面)을 계단식으로 축조한 방식으로 나눌 수 있다. 벽돌 형태로 가공한 석재로 쌓은 모전석탑은 분황사탑(634년)을 제외하면 통일신라 이후에 건립된 사례만 볼 수 있다. 영양 산해리 오층석탑, 군위 남산동 모전석탑, 제천 장락동 칠층모전석탑, 정암사 수마노탑 등이 통일신라 이후에 건립된 모전석탑이다. 이들 모전석탑은 비교적 전탑에 가까운 양식으로 낙수면을 계단식으로 쌓는 석탑과는 다른 계통인 것으로 추정된다. 낙수면을 계단식으로 축조한 형식의 모전석탑으로는 의성 탑리리 오층석탑, 구미 죽장리 오층석탑, 낙산리 삼층석탑, 경주 서악동 삼층석탑, 경주 남산동 동서 삼층석탑, 남산 용장계 지곡 삼층석탑, 의성 빙산사지 오층석탑, 월남사지 모전석탑 등이 있다. 이 중 탑리 오층석탑은 곳곳에 목조 건축의 흔적이 남아 있어 분황사 모전석탑과는 다른 석탑 양식 계통으로 분류된다.
탑리 오층석탑은 이후 선산 죽장동 오층석탑, 낙산동 삼층석탑에 영향을 주었다. 이 탑은 8~9m 높이의 고층탑으로 중층 기단 위에 탑신(塔身)을 세우고 노반(露盤)을 올렸다. 탑신부 1층에는 감실을 조성하고 출입문을 설치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 하층 기단에는 우주(隅柱)와 탱주(撐柱)가 없으나 상층 기단에는 우주와 탱주 3주를 모각하였다.
경주 서악동 모전석탑과 남산동 모전석탑, 용장계 지곡 삼층석탑은 괴체형(塊體形) 기단을 갖춘 탑이다. 이 기단은 마치 자연암반을 연상시키는데, 9세기 말을 기점으로 거대한 기단과 옥개석과 탑신을 한 돌로 제작하는 사례가 증가하였다. 고려시대에도 이러한 특징이 유지되었으며 정암사 수마노탑의 경우 장대석을 이용해 여러 단의 기단을 구성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기단과 일부 탑신부에 화강석을 사용한 것에 착안하여 모전과 전탑 모두 통일신라 전형양식 석탑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제천 장락사지 칠층석탑, 정암사 수마노탑 등 전탑 계통 모전석탑의 영향을 받아 경북 영양 현이동 오층석탑, 삼지동 석탑이 건립되었다. 또한 화순 운주사 모전석탑, 경북대학교 모전석탑, 음성 오층모전석탑, 청원 영하리 모전석탑은 전형양식 석탑을 기본으로 옥개석 낙수면에 계단식 층급을 표현한 탑이다.
이처럼 모전석탑은 고려시대에는 충청도와 강원도, 전라도까지 확대되는 양상을 보인다. 탑이 건립된 장소 대부분은 교통로와 관계된 곳으로 해당 지역의 지방 세력이 석탑의 건립을 주도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모전석탑은 단순히 전탑을 모방하기 위해서 시도되었다기보다는 목조 건축의 영향과 벽돌 공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창안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신라는 통일 이전부터 우수한 품질의 토기와 벽돌을 생산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석탑 건립에 벽돌형 석재를 이용한 것은 벽돌을 사용하는 것보다 경제적인 이득이 컸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