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유섭은 일제강점기 『조선회화집성』·『조선탑파의 연구』·『한국미술문화사논총』 등을 저술한 학자이다. 경성제국대학에서 미학과 미술사를 전공하였다. 졸업 후 한국미의 본질을 찾고자 한국의 불교 조각과 탑, 고구려 미술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1933년에 개성부립박물관 관장으로 부임하여 10여 년간 석탑 연구를 하였다. 또 불교 조각과 회화사에 대해서도 많은 논문을 발표했다. 1944년 40세에 사망하였다. 고유섭은 우리 미술을 처음으로 학문화한 학자로 높이 평가된다. 미술사에서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의 호를 따서 ‘우현상’이 제정되었다.
대학에서 미학 및 미술사에 입문한 고유섭은 리글학파와 뵐플린학파의 실증적인 학문에 매료되었고, 서양미술사, 동양미술사, 중국미술사, 일본미술사 등의 미술사강의를 접하면서 조선미술사 연구에 대한 포부를 키웠다. 1930년 졸업 후 경성제국대학 미학연구실의 조수로 근무하면서 국내의 중요한 고대 미술품의 조사와 연구에 힘썼다. 중국, 일본, 인도와 구별되는 한국 특유의 미의 본질을 찾고자 한국의 불교 조각과 탑 연구, 고구려 미술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1933년 3월 개성부립박물관 관장으로 부임하여 10여 년간 박물관의 발전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유물의 자료수집과 연구, 유적의 답사, 유물의 실견에 매진하였고 방대한 양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 때 그의 미술사 연구의 초점은 전국에 분포하고 있는 석탑에 대한 연구였다. 삼국 중 백제와 신라, 통일신라 때의 석탑들을 양식론에 입각하여 체계화하였다. 사후 그의 연구결과를 모아 책으로 간행한 것이 『조선탑파(韓國塔婆)의 연구』(1948년)이다. 이 책은 우리나라의 고대 조형(造形)을 질과 양으로 대표하는 탑파에 관한 최초의 학술적 논의이자 역작이다.
고유섭은 석탑뿐 아니라 불교미술의 전 분야에 걸쳐 관심을 가졌으며 특히 불교조각의 발전에 주목하였다. 1940년 발표한 「한국의 조각」에서는 처음으로 조각을 중심으로 미술사적 시기구분을 시도하였고 각 시대별 조각의 양식적 변화와 특징을 정리하였다.
또 1930년경부터 회화사 연구를 시작하여 규장각 장서를 중심으로 회화에 관한 문헌을 발췌하는 작업을 5∼6년간 진행하였고, 이는 사후에 『조선회화집성』으로 출간되었다. 조선시대 회화사연구는 화론(畵論)의 집성에서 시작하여 안견(安堅), 강희안(姜希顔), 정선(鄭敾), 김홍도(金弘道) 등 화가별 연구에까지 이르렀으며 이는 한국회화사의 기틀이 되었다. 고려시대 회화에 관한 연구들은 지금도 능가하기 힘든 업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아울러 고려청자를 중심으로 한 도자기 연구에도 관심을 가져 20여 편의 논문을 남겼다.
고유섭은 이밖에도 우리 미술사 전반에 관한 글을 꾸준히 발표하였고 미술사 기초자료 수집에 남다른 열의를 보였다. 그러나 1944년 40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하였다.
그가 생전에 신문이나 잡지에 발표한 글들은 죽은 뒤 제자이던 황수영(黃壽永) · 진홍섭(秦弘燮)이 『한국미술사급미학논고(韓國美術史及美學論攷)』(1963년) · 『조선화론집성(朝鮮畵論集成)』(1965년) · 『한국미술문화사논총(韓國美術文化史論叢)』(1966년) · 『송도의 고적』(1977년) 등으로 간행하였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국내에서 우리 미술사와 미학을 본격적으로 수학한 학자이자 우리 미술을 처음으로 학문화한 학자로서 높이 평가된다. 그의 우리 미술사에서의 업적을 기리는 의미에서 ‘우현상(又玄賞)’을 제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