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미술은 불교의 교리와 신앙에 기초하여 불교적인 소재를 조형화한 종교미술이다. 초기에는 불족(佛足)이나 법륜을 그려 놓고 신앙하거나 보리수 등의 상징적 대상물을 예배하다가 이후 교화활동과 불교의식 수행을 위해 불탑과 불상을 제작하면서 발전하였다. 불교가 번성하면서 건축, 조각, 공예, 회화 등 여러 영역에서 나라마다 독특한 불교미술을 낳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불교 수용 이후 건립된 사찰과 석탑이 전국에 산재해 있고, 다양한 소재로 만들어진 불상, 회화, 범종 등 불교미술품이 고미술의 주류를 이룰 정도로 그 내용이 빼어나다.
예배의 대상 또는 교화 활동, 불교 의식의 필요에 의해서 발생, 전개되었다. 따라서 불교 미술은 불교의 성립과 동시에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초기에는 불상을 대신하여 불족(佛足)이나 법륜을 그려 놓고 신앙하거나 보리수(菩提樹) 등의 상징적 대상물을 예배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초기의 조형 예술이 점차 체계를 갖추어 감에 따라서 그 신앙의 2대 중심은 결국 불탑(佛塔)과 불상에 귀착되어졌다. 이들은 건축과 조각의 분야로, 이들이 당탑가람(堂塔伽藍)의 중심에 자리 잡고 수많은 장엄을 필요로 하게 됨에 따라 이곳에서 차차 불교 미술이 발전하게 되었다.
또한 이와 함께 의식(儀式) 및 장엄구의 필요에 따라 공예의 발달을 보게 되었다. 이들이 바로 불교 미술의 각 부문을 구성하는 것이다. 즉 불교 미술은 분야별로 본다면 대략 건축 · 조각 · 회화 · 공예로 나눌 수가 있다.
불교 미술은 서기전 2세기경 불교가 발생한 인도에서부터 비롯되어 인도뿐만 아니라 중국을 비롯한 동양 여러 나라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불교가 전파된 여러 나라에서는 불교를 바탕으로 삼아 각 민족 고유의 역사와 사상에 알맞는 독특한 믿음과 문화를 형성하였다.
우리나라에서도 372년(소수림왕 2년) 고구려에 처음 불교가 수용될 때 순도(順道)가 불상과 경문을 함께 가지고 왔다. 또 375년에는 최초의 사원 초문사(肖門寺)가 건립되어 우리나라 불교 사원의 시초가 되었다.
그리고 백제와 신라에서도 불교 미술의 조형 활동이 활발해졌다. 이후 통일신라와 고려는 물론 조선시대에까지도 불교의 발전 추이 및 사회적인 변화와 함께 다양한 발전과 변화를 거듭하였다. 이들이 우리나라 고미술의 주류를 이루어 왔다.
불교는 원래 그 자체에 독특한 건축 양식을 지니지 못하였다. 또 그 발생국인 인도의 것을 고집하지도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불교가 각국에 유전(流轉)됨에 있어서는 그 도달된 지역의 건물이 그대로 불사(佛寺)로서 전용되었다. 그러므로 불교가 처음 전해졌을 때는 궁전 내지 관아 건물이 그대로 ‘사(寺)’로서 등장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불교 건축은 크게 목조 건축과 석조 건축으로 구분할 수 있다. 목조 건물로서 고려 이전으로 올라가는 건물은 한 점도 전래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 정확한 양식을 고찰할 수는 없으나 계속된 유구(遺構)의 발굴을 통하여 그 전모와 배치 방안 등을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석조 건축은 석굴 사원(石窟寺院)과 탑파(塔婆)로 대표된다. 석탑은 그 독특한 양식으로 볼 때 그 질과 양 모두 우리나라 문화유산 중 으뜸가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불교 전래와 함께 사원 건물이 이룩되었음은 앞서 지적한 바와 같다. 하지만 과연 그들이 어떠한 양식으로 건립되었는지에 대하여는 자세하게 알 길이 없다.
삼국 가운데 가장 먼저 불교를 수용한 고구려는 평양에 9사(九寺)를 비롯하여 상당수의 사원을 건립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고구려 사원에 대하여는 간혹 문헌을 통하여 몇몇 사명(寺名)을 알 수 있을 뿐 그 사지에 대하여는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있다.
다만 사지의 발굴을 통하여 가람 배치를 짐작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평원군원오리사지(元五里寺址, 1937년 발굴)와 평양청암리사지(淸巖里寺址, 1938년 발굴) 그리고 대동군 임원면상오리사지(上五里寺址) 등이다.
이들 중 청암리사지는 8각형의 목탑지와 함께 금당지가 발견됨으로써 1탑3금당식(一塔三金堂式)의 가람 배치 방식임이 알려졌다. 이러한 가람 배치 방식은 일본 최초의 사찰인 아스카사(飛鳥寺) 또는 신라 황룡사(皇龍寺)의 가람 배치와 비교하여 더욱 중요시되고 있다.
백제에 있어서는 특히 건축술이 발달되어 그 당시의 장관을 알 수가 있다. 또 뛰어난 솜씨로 신라 황룡사의 9층탑을 건립하였다는 백제의 아비지(阿非知)나 일본 초기 가람의 장엄을 통하여서도 백제의 건축술이 탁월하였던 사실을 짐작할 수가 있다. 공주와 부여를 중심으로 많이 남아 있는 사지들 중 본격적인 발굴을 통하여 가람 배치가 확인되었다.
그 예로 부여 군수리사지(軍守里寺址)와 동남리(東南里)의 폐사지 및 금강사지(金剛寺址)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중 군수리사지의 배치는 중문지 뒤쪽에 목탑지가 있고 그 북쪽에 금당지가 있다.
그 좌우에는 건물지가 알려져서 소위 남북 일직선 위의 1탑식 가람 배치(一塔式伽藍配置)임이 밝혀졌다. 이러한 형식은 백제 가람 배치의 기본으로서 부여정림사지(定林寺址)에서도 동일한 형식이 나타나고 있다.
또한 금강사의 가람 배치는 군수리사지의 가람 배치와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백제가람이 남향인 데 비하여 유독 이 사지만 동향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이와 관련하여 현재 발굴이 진행되고 있는 익산 미륵사지의 조사 결과가 크게 주목을 받고 있다.
신라의 사원 건축도 대략 고구려나 백제와 많은 유사점이 있었다고 추정된다. 황룡사의 조사에서 밝혀진 당탑의 배치는 이 같은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황룡사의 가람 배치는 고구려 청암리사지의 배치와 유사하다. 탑 뒤에 금당과 그 좌우에 건물이 남향하고 있어 3금당식 가람 배치(三金堂式伽藍配置)임을 알 수 있다.
이들 삼국의 불교 건축에 있어서 가람의 중심을 차지하는 것이 목탑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수 있다. 초기의 목탑은 3국 모두 중국에서 전래한 누각 형식을 따랐으며 방형(方形 : 네모반듯한 모양)이나 다각의 다층탑이 주류를 이루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예는 고구려 청암리사지와 백제 군수리사지 그리고 신라의 황룡사지에서 모두 공통된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에 세운 사찰은 사천왕사(四天王寺) · 망덕사(望德寺) · 감은사(感恩寺) 등이다. 이어 계속 고선사(高仙寺) · 불국사(佛國寺) 등 경주를 중심으로 많은 사찰이 건립되었다. 이들 가운데 고선사를 제외한 모든 사찰은 금당 앞에 탑이 동서 두 곳에 세워지는 쌍탑식 가람 배치(雙塔式伽藍配置)임이 밝혀졌다.
쌍탑식 가람 배치는 금당 앞 좌우에 탑을 배치하고 금당 뒤에 강당, 쌍탑 중심 앞쪽에 중문을 배치한다. 중문에서는 동서로 파생한 회랑이 강당 좌우에 닿는다. 그리고 금당에서도 역시 좌우 회랑으로 익랑(翼廊 : 대문의 좌우 양편에 이어서 지은 행랑)을 내는 배치이다.
고려 초기의 목조 건축은 신라시대의 건물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그 후 점차 부분적인 변화를 나타내어 고려의 개성이 가미된 건축상을 나타내게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오늘날에 그 유구가 남아 있지 않아 그 실태를 짐작하기는 매우 어렵다. 현존하는 고려시대의 목조 건축 중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가 봉정사 극락전(국보, 1962년 지정)으로 정면 3칸, 측면 4칸의 주심포 계통의 건물이다.
이밖에 역시 주심포 계통의 건물로 부석사(浮石寺)의 무량수전(無量壽殿)과 조사당(祖師堂)을 들 수 있다. 또한 1308년(충렬왕 34년)에 건립된 수덕사(修德寺)의 대웅전은 같은 주심포 계통이면서 지붕 추녀의 곡선, 가늘고 긴 기왓골의 섬세한 모습 등은 보는 이로 하여금 고려 목조 건축의 우수성을 실감하게 한다.
조선시대의 목조 건축도 고려시대에 도입된 주심포 양식과 다포 양식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 두 양식은 도입된 직후에는 순수한 양식적 특징을 서로 간직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고려 말부터 서로 혼합, 절충되어 한국적인 목조 건축으로서의 특징을 나타내게 되었다. 조선 초기의 건물로서는 1473년 도갑사 해탈문(국보, 1962년 지정), 1476년 무위사 극락전(국보, 1962년 지정) 및 송광사 국사전(국보, 1962년 지정)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주심포계의 건물이다.
또한 1484년 개심사 대웅전(보물, 1963년 지정)과 1617년 중창 관룡사 대웅전(보물, 1963년 지정)은 이 시기의 다포계 양식으로 주목되는 건물이다. 이밖에 조선 중기 이후의 건물로는 내소사 대웅전(보물, 1963년 지정), 통도사 대웅전(국보, 1997년 지정) 및 우리나라의 유일한 목탑인 법주사 팔상전(국보, 1962년 지정)과 금산사 미륵전(국보, 1962년 지정) · 화엄사 각황전(국보, 1962년 지정) 등을 주목할 수 있다.
석굴사원이란 자연적이건 인공적이건, 암석으로 이루어진 석굴을 이용하여 법당을 삼은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천연의 바위를 뚫어서 만들거나 아니면 석재로써 결구(結構)하여 그 공간이 법당이 되어서 예배 장소로 쓰이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석굴사원은 그 자체가 웅장하고 아름다운 건축이고 조각이다. 또 회화를 수반하는 종합적 조형물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이와 같은 석굴의 대표적인 것으로는 인도의 아잔타 석굴(Ajanta石窟), 중국의 돈황 석굴(敦煌石窟) 그리고 우리나라의 석굴암을 들 수 있다.
삼국시대의 석굴사원을 살펴보면, 고구려에서는 이렇다 할 문헌적 기록이나 유구를 발견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백제에 있어서는 유구나 문헌에서 약간의 석굴사원을 짐작할 수 있다. 공주 남산의 남혈사(南穴寺), 망월산의 서혈사(西穴寺), 북혈사(北穴寺)와 동혈사(東穴寺) 등을 주목할 수 있다.
또한 태안의 마애석불과 서산의 마애삼존불은 모두 거대한 바위를 파서 감실(龕室)을 마련하여 불상을 부조(浮彫 : 돋을새김)하였다. 그리고 여기에 목조 전실(木造前室)을 조영하여 석굴로서의 변화상을 나타내고 있다.
신라시대에는 수많은 석굴사원이 조영되었다. 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 경북 경주시 단석산 상인암(上人巖)의 석굴사원이다. 높이 827m의 단석산 상봉 서남쪽 바로 아래 위치한 천연의 거대한 네 바위를 이용하여 석굴을 조성하였다.
이곳은 동남북 3면이 병풍처럼 싸여 ㄷ자를 이루었다. 그 가운데 형성된 자연의 석실 안에는 수십 척 절벽에 인공을 가하여 불상 · 보살 등 10구를 각 면에 새겨 놓았다. 또한 천연의 석실을 굴착해서 만든 것으로는 경주 남산 동쪽 기슭에 불곡마애석굴(佛谷磨崖石窟)을 들 수 있다.
다음으로 주목할 수 있는 것은 인공으로 축조한 석굴 사원이다. 즉, 크고 작은 돌을 쌓아서 인공적으로 석굴을 조성한 것이다. 이러한 수법은 인도나 중국에서도 일찍이 볼 수 없었고 오직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수법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경주 석굴암 석굴이다. 석굴암의 내부 기본 구조는 전실(前室)과 석감형(石龕形)의 주실(主室)로 이루어져 있다. 전실과 주실 사이에는 너비 3.6m, 길이 2.9m의 연도(羨道)가 있어 두 실을 구분하고 있다. 전실은 너비 6.8m, 길이 4.8m의 직사각이며, 주실은 원형으로 반경이 3.6m이다.
석굴의 각 벽에는 모두 큰 판석을 짜 올렸다. 이 위에 인왕상(仁王像) · 팔부중상(八部衆像) · 사천왕상(四天王像) 그리고 10대 제자상과 보살상들을 조각하였다. 그리고 상단의 감실에는 보살 등의 독립상이, 그리고 주실에는 본존불이 위엄 있는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일찍부터 ‘석탑의 나라’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전국 도처에서 생산되는 희고 견고한 화강석을 재료로 하여 우리나라 특유의 석탑을 조성하기에 이른 것이다.
우선 석탑의 발생국으로 백제를 지목해야 한다. 사탑(寺塔)이 많은 나라로 외국에까지 알려졌던 백제는 목탑에 이어 석재로서 탑파(塔婆)를 건립한 우리나라 석탑의 발생국이다.
백제 땅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석탑으로는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의 미륵사지석탑과 충청남도 부여의 정림사지탑을 들 수 있다. 미륵사지석탑은 규모가 매우 커서 일찍부터 ‘동양의 대탑’이라 불려 왔다.
『동국여지승람』에는 “동방석탑지최(東方石塔之最)”고 기록되어 있다. 이 탑의 모범은 목탑에 있었다. 즉 다층 목탑의 각 부재를 모두 석재로 대용해서 건립한 것이다. 기단이 매우 낮은 점이나, 3칸 4면을 본떠 귀퉁이 기둥[隅柱]과 면석을 두른 점 등에서 목탑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1962년 지정)은 미륵사지석탑(국보, 1962년 지정)에 비하여 규모가 작아졌고 세부의 변형도 있었다. 그러나 그 모범이 목탑에 있었던 사실에서 익산 미륵사지탑과 같은 계통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목탑을 모방한 백제 석탑과는 달리 신라의 석탑은 분황사석탑(국보, 1962년 지정)에서 보는 바와 같이 벽돌탑[塼塔]에서 그 시원 양식을 찾을 수 있다.
통일신라의 석탑은 삼국통일을 계기로 백제와 신라의 각기 다른 양식을 종합하여 ‘신라 탑 양식’이라 할 수 있는 특색 있는 양식을 갖추면서 전개되었다.
삼국통일의 새로운 계기를 맞아 건립된 석탑으로서는 먼저 감은사지 삼층석탑(국보, 1962년 지정)과 고선사지 삼층석탑(국보, 1962년 지정)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신라 석탑 전형 양식(典型樣式)의 초기 예에 속한다.
이들의 가장 두드러진 특색은 기단이 2층이고, 탑신은 3층으로 줄어든 점, 옥석 받침이 5단이라는 점 등이다. 또한 넓고 든든한 기단과 상하간의 체감률이 낮아 신라탑 특유의 안정감을 주고 있다.
이러한 통일신라의 석탑 양식은 8세기 중엽의 불국사삼층석탑에서 웅대한 기단과 주체를 이루는 탑신이 조화되어서 가장 세련된 양식으로 완성되었다. 또한 갈항사지석탑(葛項寺址石塔)도 이 시기의 대표적인 것이다. 758년(경덕왕 17)의 명문이 기록되어 있어 중요한 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이러한 전형 양식은 9세기로 들어오면 신라 하대 석탑 양식으로 변모하게 된다. 우선 기단 폭이 좁아지고 탑의 크기가 작아지며 세부 수법이 간략화되어 외양 위주의 장식성이 강조된다. 즉, 기단이나 탑신에 불상 · 12지상 · 사천왕상 등이 새겨진다.
그리고 옥개의 두께가 얇아지고, 층급 받침이 5단에서 점차 줄어들며 그 두께도 얇아져 초기탑보다 섬약한 느낌을 준다. 이러한 하대탑의 예로는 경주 남산 용장사곡삼층석탑, 동화사삼층석탑, 단속사지동 · 서삼층석탑, 화엄사동 · 서오층석탑, 보림사삼층석탑 등 많은 예를 찾아볼 수 있다.
한편, 통일신라 석탑 가운데 이상과 같은 전형적인 형식 외에도 특이한 형식과 의장을 갖춘 이형탑(異型塔)들이 조성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불국사의 다보탑(多寶塔)이다.
이 탑은 2층 기단 위에 8각형의 사리탑을 올려놓은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어 일반 석탑처럼 층수를 계산할 수가 없다. 층층이 각(角)과 원의 기묘한 변화와 장식이 돋보이며, 2층 기단 위의 8각탑신은 정상 옥개 밑에 자리 잡고 있다.
위쪽으로 갈수록 그 조화의 미는 더욱 화려함을 나타내 한층 변화와 아름다움을 더한다. 안상형(眼象形)을 나타내는가 하면 꽃술 모양을, 또는 둥근 연화문(蓮花文 : 연꽃무늬)을 나타내기도 한다. 층층마다 방형 또는 8각의 난간으로 이루어진 이 다보탑은 실로 신라의 조형 의욕을 발휘한 명탑이라 할 것이다.
이밖에도 화엄사사사자삼층석탑(국보, 1962년 지정)과 같이 상층 기단의 우주를 대신하여 4마리 사자를 네 모퉁이에 안치한 형식, 또 정혜사지 십삼층석탑(국보, 1962년 지정) 등 특이한 형식의 탑들도 조성되어 통일신라 건축술의 다양함과 우수함을 보여 주고 있다.
신라 하대에는 선종의 유행과 더불어 고승들의 묘탑(墓塔)인 부도가 많이 만들어진다. 형식은 염거화상부도(廉居和尙浮屠)(국보, 1962년 지정)와 같이 8각형연화좌 위에 기와지붕을 한 8각당(八角堂)을 올리는 것을 기본 구조로 한다.
그리고 표면에 12지상 · 사천왕상 · 연화문을 비롯한 각종 문양 등을 조각하여 그 형태와 아울러 더욱 장식성을 높여 주고 있다. 태안사 적인선사탑(861년)(보물, 1963년 지정) · 쌍봉사철감선사탑(868년)(국보, 1962년 지정) · 보림사보조선사창성탑(880년)(보물, 1963년 지정) ·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882년)(보물, 1963년 지정) · 실상사수철화상능가보월탑(894년)(보물, 1963년 지정) 등이 이러한 양식에 속하는 부도들이다.
고려시대의 석탑은 신라 이래 전통 양식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점차 지방적인 특색이 가미되었으며, 그 분포도 지역적으로 3분할 수가 있다. 즉, 개성 이북에 조성된 고려 양식의 탑, 신라의 옛 땅인 경상도를 중심으로 하는 신라 탑 양식의 석탑 그리고 충청도 · 전라도를 중심으로 하는 백제 탑 양식의 석탑 등으로 나누어진다.
개성을 중심으로 하는 석탑으로는 현화사칠층석탑 · 남계원칠층석탑 · 흥국사석탑 · 관음사석탑 등을 들 수 있다. 경상도를 중심으로 하는 석탑 중 개심사지오층석탑(1010년)과 정토사지오층석탑(1031년)은 연대가 기록되어 있어 주목된다.
그리고 백제 석탑계의 양식을 따르는 석탑으로는 무량사오층석탑 · 장하리삼층석탑 · 계룡산남매탑 · 왕궁리오층석탑 및 보원사지오층석탑 등을 들 수 있다.
조선시대의 석탑 가운데 특히 주목할 수 있는 것은 고려 말의 경천사십층석탑과 같은 양식을 보이는 서울 원각사지십층석탑이다. 규모도 매우 크고 탑신 전면에 화려한 조각을 새긴 특이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우리나라 불교 미술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것은 역시 건축에 이어 조각이라고 볼 수 있다. 불상은 불교도들의 직접적인 숭배 대상이므로, 불상 출현 이후 신앙의 중심이자 불교미술의 핵심을 이루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교가 우리나라에 수용될 당시 순도(順道)가 가지고 왔다는 불상이 어떠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인도 불상이라기보다는 중국에서 변형된 양식의 불상일 것으로 짐작된다. 우리나라 불상은 초기에는 이처럼 중국 불상을 모범으로 삼았으나 불교가 성행하고 조각술이 발달함에 따라 점차 각국의 특성에 맞는 양식으로 변형하여 발전시켜 나아갔다.
현존 고구려 불상은 주로 소형이며 작품도 매우 적은 편이다. 그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것으로서는 먼저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국보, 1964년 지정)을 들 수 있다. 둥근 연화대좌 위에 직립하였으며 등 뒤에는 큰 주형 광배(舟形光背)가 있다. 여기에 4행 47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어 더욱 중요시되고 있다.
긴 얼굴에 부푼 눈과 큰 귀, 미소 짓는 입 등에서 느껴지는 고격한 느낌을 준다. 직립한 자세, 두꺼운 불의(佛衣)가 아래로 내려오면서 힘찬 주름선을 이루는 모습 등이 고구려 불상으로서의 기백과 세련된 솜씨를 보여 주는 것이다.
‘연가’라는 연호는 기록에는 없으나 고구려의 연호로서, 7년의 기미년은 불상 양식으로 보아 539년(안원왕 9), 또는 599년(영양왕 10)으로 비정된다.
다음은 황해도 곡산에서 발견된 금동신묘명삼존불입상을 들 수 있다. 현재 대좌는 잃어버렸으나 광배는 완존하고 있다. 삼존 모두 입상으로 본존불은 연가7년명금동여래입상에 비하여 양식상 연대가 내려와서 중국 육조시대 말 제(齊) · 주(周)의 영향을 나타내고 있다. 광배에는 ‘景四年在辛卯比丘……’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이밖에도 고구려 불상으로는 평양 평천리에서 발견된 금동미륵반가상(국보, 1964년 지정), 금동보살입상(보물, 1963-2 지정), 평남 대동군 원오리에서 발견된 이조보살입상(泥造菩薩立像) 등이 있다.
백제의 불상은 주로 사비시대(538∼660년)의 작품으로 고찰할 수 있다. 이 시기를 다시 전후의 2기로 구분하여 전기는 위덕왕의 치세를 중심으로 한 6세기 후반까지, 후기는 무왕의 치세부터 백제 멸망기까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전기에 속하는 금동불로서는 금동관음보살입상(국보, 1968년 지정)과 부여박물관에 소장된 금동정지원명석가여래삼존입상(보물, 1963년 지정)을 들 수 있다. 후자는 8.5㎝의 소상이지만 삼존상으로서 광배 뒷면에는 “정지원(鄭智遠)이 조성하였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조성 연대는 없으나 양식상 6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또한 이 시기의 불상으로 군수리금동미륵보살입상(보물, 1963년 지정)을 주목할 수 있다. 보관을 썼으며 X자형으로 교차된 천의(天衣 : 천인(天人)이나 선녀의 옷)가 주목된다.
후기의 금동불로서는 부여군 규암면에서 발견된 보살입상 2구가 유명하다. 이들은 보관이나 상호(相好 : 부처의 몸에 갖추어진 훌륭한 용모와 형상)의 솜씨와 긴 몸에 걸친 천의나 영락(瓔珞 : 구슬을 꿰어 만든 장신구)의 양식 등이 매우 우수한 작품이다.
이러한 양식은 전기 불상의 엄격한 전통 양식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자세와 화려한 장식 수법 등 백제 불상의 양식적 변천을 보여 주는 것이다. 또한 중국 수 · 당 이래의 새로운 양식과도 유사하다.
후기에서 한층 주목되는 것은 석조 불상의 조형이다. 특히 이들은 서산과 익산을 중심으로 하였다. 서산 지방에는 마애불이, 익산 지방에는 독립된 석상이 이루어졌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중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서산 운산면 용현리 인바위[印巖]에 새겨진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국보, 1962년 지정)이다. 중앙에는 시무외(施無畏) · 여원인(與願印)을 짓고 보주형의 두광(頭光 : 부처나 보살의 정수리에서 나오는 빛)을 지닌 중앙 여래입상이 당당한 자세로 서 있다. 만면에 천진한 미소를 띤 얼굴에서 친근감이 느껴지며 광배의 연화문과 불의의 착용법이 고식(古式)을 보여 주고 있다.
협시보살상은 좌협시는 반가상이고 우협시는 입상인 희귀한 배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들 3존은 여래와 미륵 · 관음 두 보살로 추정되고 있다.
또 하나의 마애불인 태안마애삼존불(국보, 2004년 지정)도 주목된다. 좌우에 각 1구의 여래입상이 있고 그들 사이에 키가 작은 보살입상 1구를 배치한 특이한 형식이다. 이들 또한 서산마애삼존불상과 같이 당시의 신앙에 따라서 삼존을 골라 새긴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석가 · 관음 · 약사라고 구전되고 있다.
이들 두 마애불은 백제에서뿐만 아니라 삼국시대 으뜸의 마애석상으로 생각되어 한국 석조 미술의 초기 작품을 대표한다고 하겠다.
또한 익산연동리석불좌상(보물, 1963년 지정)은 머리가 없으나 높이 3.63m, 너비 2.64m의 삼국 최대의 광배로 더욱 유명하다. 광배 가장자리의 화염문(火焰文 : 불꽃무늬)과 7구의 화불(化佛)은 당시의 양식을 전하고 있어 주목되고 있다.
이밖에 백제와 관련하여 백제가 멸망한 직후인 7세기 후반에 그 옛 땅에서 백제 유민들에 의하여 조성된 일련의 비상(碑像)들에 대하여 언급해야 할 것이다.
이 비상들은 충청남도 연기군의 비암사(碑巖寺)를 중심으로 그 주변에서 발견된 7개의 납석제 불상을 말한다. 또한 이 비상들은 모두 아미타불과 반가상을 주존으로 삼고 있어 당시 신앙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은 계유명전씨아미타불삼존석상(국보, 1962년 지정) · 기축명아미타불제불보살석상(보물, 1963년 지정) · 미륵보살반가사유비상(보물, 1963년 지정) · 계유명삼존천불비상(국보, 1962년 지정) 등이다.
이와 같은 불상 외에 1983년에 새로 발견, 조사된 예산화전리사면석불(보물, 1984년 지정)이나 정읍보화리석불입상(보물, 1987년 지정) 2구는 모두 거대한 작품으로 새로 주목을 받고 있다.
한편, 고신라의 불상 양식은 600년을 전후하여 살필 수 있다. 특히 600년 이전인 진평왕대는 불교 미술의 중요한 과도기이다. 이 시기에 신라 조각은 발전의 기반을 형성함과 동시에 외래 양식의 도입과 습득으로 꾸준한 기술의 연마가 이루어졌다고 생각된다. 그리하여 7세기 중엽으로 접어들면서 그 내실은 더욱 충실하게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먼저 금동상으로는 국립중앙박물관의 약사여래입상 · 삼양동 금동관음보살입상(국보, 1968년 지정), 경상북도 선산(지금의 구미) 출토의 금동보살입상 2구(국보, 1976-1 지정) (국보, 1976-2 지정) 및 금동여래입상(국보, 1976년 지정), 양평 신화리 금동여래입상(국보, 1976년 지정) 등이 대표적인 작품으로 손꼽힌다.
다음으로 특기할 것은 미륵보살로 추정되는 반가사유상의 조성이다. 금동미륵보살반가상(국보, 1962-1 지정)은 머리에 탑으로 장식된 보관을 썼는데 긴 얼굴에는 근엄한 기풍이 나타나 있다. 제작 연대는 안동 옥동 출토 금동반가사유상(국립경주박물관 소장)과 함께 6세기 후반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 다른 금동미륵보살반가상(국보, 1962-2 지정)은 낮은 삼산관(三山冠)이나 상반신이 나체인 양식 또는 대좌에 걸친 옷무늬의 양식 등에서 금동미륵보살반가상(국보, 1962-1 지정)보다 연대가 내려가 7세기 중엽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들 두 반가사유상은 우리나라 고대 조각을 대표하는 걸작이라 할 수 있다.
석조불로서는 우선 단석산신선사마애불상군(국보, 1979년 지정)을 들 수 있다. ㄷ자형의 천연적인 석굴 사원에 총 10구의 불보살상과 인물상들이 새겨져 있다.
굴의 북쪽 바위에는 약 7m나 되는 거대한 여래입상을 새기고, 동쪽과 남쪽 벽에는 보살입상이 각 1구씩 조각되어 삼존상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명문에 의하여 미륵삼존임을 알 수 있으며, 각 상의 양식 및 기법으로 볼 때 6세기 후반경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밖에 석불로는 경주 남산 불곡 마애여래좌상(보물, 1963년 지정)과 장창곡(長倉谷)에서 발견된 삼화령미륵세존(三花嶺彌勒世尊, 644년 추정) 및 송화산 금산재(金山齋)에서 전래하던 목 없는 반가상을 주목할 수 있다.
금산재는 김유신 장군묘의 재실로서 이곳은 그의 일가 대대의 원찰(願刹)이었던 송화방(松花房)이라는 사실과 그 불상이 미륵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단석산신선사마애반가상과 비교할 때 7세기 전반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시대의 불상 조각은 대략 3기로 대별할 수 있다. 제1기는 통일 직후에서 700년까지, 제2기는 700년경부터 약 100년간, 제3기는 800년경에서 신라 말기인 10세기 초엽에 이르기까지이다.
제1기의 조각은 아직도 전대의 비사실적인 조법과 경직된 의습(衣褶 : 옷주름)이나 작고 둥근 동안(童顔)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 대좌 또한 옛 식을 따라 낮고 둥글며 거의 단판(單瓣 : 홑꽃잎)의 연꽃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황복사지삼층석탑에서 발견된 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좌상(국보, 1962년 지정)은 신라에서 유례가 없는 작품으로 광배와 대좌도 완전하다. 금동함 뚜껑에 새겨진 명문에 의하면 이 불상은 706년(성덕왕 5) 왕실의 발원으로 봉안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감은사지삼층석탑에서 발견된 사천왕입상 4구는 680년(문무왕 20)경의 작품으로 주목된다.
이 시기의 석상으로는 경주서악리마애석불상(보물, 1963년 지정), 봉화북지리마애여래좌상(국보, 1980년 지정) 및 영주 가흥동 마애여래삼존상 및 여래좌상(보물, 1963년 지정) 등을 주목할 수 있다.
또 이 시기의 대표적인 석상으로는 군위 아미타여래삼존 석굴(국보, 1962년 지정)의 삼존불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관음 · 세지를 협시로 한 아미타삼존불이다. 석굴암 석굴보다 약 반세기 이상 앞선 작품으로 매우 귀중한 작품이다.
제2기인 8세기는 성덕왕과 경덕왕의 두 왕대를 중심으로 신라 조각 미술의 꽃을 피운 시기이다. 이 시대의 금동불상으로는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국보, 1962년 지정)과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국보, 1962년 지정), 백률사금동약사여래입상(국보, 1962년 지정) 등을 들 수 있다.
모두 중후한 얼굴과 통견(通肩 : 어깨에 걸침)의 옷주름 처리 등에서 우수한 작품이라 하겠다. 이밖에 소금동불들이 다수 전래되고 있어 이 시대 불상 연구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8세기 전기 석상의 대표작은 감산사석조미륵보살입상(국보, 1962년 지정)과 감산사석조아미타불입상(국보, 1962년 지정)을 꼽을 수 있다. 불상 자체도 완전할 뿐 아니라 광배 뒷면에 조상기(造像記)까지 새겨져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명문에 의하여 볼 때 이들은 719년(성덕왕 18) 김지성(金志誠)에 의하여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감산사 불상에 이어 들 수 있는 것이 석굴암 안의 석상들이다. 석굴암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권5 대성효2세부모(大成孝二世父母)에 창건 설화와 건립의 인연 등이 기록되어 있다.
본존인 여래좌상은 당당한 체구와 우아한 얼굴 그리고 섬세한 옷무늬의 조각 등이 조화를 이루었다. 크고 둥근 연화좌와 후벽 천장 밑에 새겨진 연꽃무늬의 두광 등도 우수한 수법을 보이고 있다.
본존을 중심으로 하는 주벽에는 보살 · 천부 · 10대제자 등의 입상과 그 위쪽의 작은 감실 속에 좌상 10구(현재 8구 유존)를 안치하였다. 이들은 모두 매우 우아하면서도 자유스러운 모습으로 오랫동안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뒷벽 중앙의 11면 관음보살상은 긴 체구에 가득히 늘인 영락의 장엄 · 우아하고 자비스러우며 기품이 높은 조상 양식은 신라 조각의 명공만이 이룩할 수 있는 명작이다.
전방후원(前方後圓)을 기본으로 삼은 이 석굴 입구에는 사천왕상 · 인왕 · 팔부신장상이 좌우로 대립하고 있다. 이중 팔부신장의 조각은 양식적으로 볼 때 다른 것보다 연대가 떨어짐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석굴의 경영을 위하여 수십 년의 긴 세월이 소요되었으나 김대성(金大城)이 완성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남에 따라 나라에서 완성하였다는 옛 기록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와 같은 석굴암 본존을 모범 삼아 이루어진 조각으로는 경주삼릉계석불좌상(보물, 1980년 지정)이나 경주남산미륵곡석불좌상(보물, 1963년 지정) · 청량사석조석가여래좌상(보물, 1963년 지정)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8세기 불상 조각은 석굴암 본존을 정점으로 점차 내리막길에 들어서 섬약과 장식에 흘렀다. 이러한 추세는 9세기에 들어서 더욱 두드러졌다.
9세기의 신라는 정치 · 사회적으로 크나큰 혼란의 시기였다. 왕권을 둘러싼 골육상쟁과 지방 분권화가 정착되어 갔다. 이러한 현상과 함께 불교계에서도 9산선문(九山禪門)이 성립되는 등 선종이 크게 대두되었다. 불교 조각에 있어서도 선종의 도입과 밀교의 유행으로 비로자나불이 주존으로 많이 조성되었다.
858년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1963년 지정), 865년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1962년 지정) 및 863년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1963년 지정) 등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또한 이들 불상에서 보듯 철불이 많이 조성된 것도 이 시대 불상 조각의 한 특징이라 하겠다.
이밖에 석상으로는 801년 방어산 마애불(보물, 1963년 지정) · 고운사 석조석가여래좌상(보물, 1963년 지정) · 간월사지 석조여래좌상(보물, 1963년 지정) · 청룡사 석조여래좌상(보물, 1965년 지정) · 불곡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1966년 지정) 등 수많은 작품을 열거할 수 있다.
통일신라의 뒤를 이어 새로운 왕조를 창건한 고려 태조는 통일 국가의 정신적인 이념을 불교에 두었다. 그래서 수도인 개경에는 10대 사찰을 비롯하여 수많은 사찰이 건립되고 이에 따라 불교 미술 또한 크게 발달을 보게 되었다.
우선 이 시대의 금동상으로는 영탑사 금동삼존불(보물, 1964년 지정)과 장곡사 금동약사여래좌상(국보, 2022년 지정)을 들 수 있다. 후자는 근년에 발견된 복장의 조사에 의하여 14세기 작으로 밝혀졌다.
또한 신라 말부터 유행된 철불 조성의 전통이 이어져 하사창동 철조석가여래좌상(보물, 1963년 지정) 및 충주 철조여래좌상(보물, 1963년 지정)을 비롯하여 국립중앙박물관에 다수의 철불상이 진열되어 있다.
석불상 또한 많이 전해지는데 높이 18m의 국내 최대의 석상인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1963년 지정)은 각부의 균형은 불완전하나 이 시대 초기의 거작으로 특기할 만하다.
또한 북한산 구기동 마애석가여래좌상(보물, 1963년 지정)을 비롯하여 10세기의 명문이 있는 하남 교산동 마애약사여래좌상(보물, 1989년 지정) 등 마애불상도 많이 있다. 이러한 원각 또는 마애거상으로 지방에 전래하고 있는 것은 거의 이 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중 중요한 예로는 관음사보살좌상 · 신복사지 석조보살좌상(보물, 1963년 지정) · 월정사 석조보살좌상(국보, 2017년 지정) · 안동 이천동 마애여래입상(보물, 1963년 지정) · 거창 양평리 석조여래입상(보물, 1963년 지정)과 거창 상림리 석조보살입상(보물, 1963년 지정) 그리고 개태사지석불입상(보물, 1963년 지정)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소조상(塑造像)으로서 부석사 소조여래좌상(국보, 1962년 지정)은 신라 이래의 오랜 수법을 이어받고 있는 국내 최대의 아미타여래소조상이다. 거대한 광배가 완존하고 있어 주목된다.
새로운 조선 왕조는 유교로 국교를 삼아 불교를 배척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초기인 세조 때 불교 진흥의 기운이 있어 한때 사원의 수축과 조상이 이루어졌다.
이때를 전후한 작품으로서 수종사팔각석탑에서 나온 금동불상들은 15세기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석상으로는 특기할 만한 게 없고, 다만 목조상으로는 강원도 상원사의 문수동자상(국보, 1984년 지정)이 초기의 작품으로 주목된다.
그 뒤 임진왜란을 지나서는 전기의 여세를 이어서 많은 사원이 복구되었다. 그에 따라 오늘에 전하는 토불이나 목불을 남겼다. 그중에는 전대의 기법을 계승한 우수작이 들어 있다.
불교 회화는 사원의 건립과 함께 등장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삼국의 오랜 사원에는 불교 회화가 봉안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삼국시대의 불교 회화는 전하는 것이 없다. 다만 고분 벽화에 나타나는 불교적인 요소를 살펴보거나 기록에 의하여 약간의 화적을 짐작할 뿐이다.
먼저 고구려에 있어서는 일본에 건너간 화사들, 그중에서도 담징(曇徵)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되는, 일본 호류사(法隆寺) 금당의 벽화가 있다. 그리고 이와 함께 고구려 무용총의 공양도나 쌍영총의 행렬도, 장천리 고분의 예불도 같은 고분 벽화에서 불교 회화의 소재를 주목할 수 있을 것이다.
백제에 있어서는 부소산 절터에서 발견된 사원 벽화의 파편 및 무령왕릉 유품이나 부여 능산리 고분 벽화의 천장도에 나타난 연화문 등에서 백제 불교 회화의 발달을 짐작할 수 있다.
고신라에 있어서는 금관총이나 천마총, 고령의 벽화 고분, 순흥의 벽화 고분 등에서 발견된 연꽃무늬를 통하여 당시의 화적을 다소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삼국유사』에는 고신라 및 통일신라시대의 불교 회화에 관한 기록이 산견되고 있다. 이들은 모두 사원의 벽화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특히 황룡사의 노송도(老松圖), 분황사의 천수대비관음보살도(千手大悲觀音菩薩圖)와 단속사의 유마상(維摩像)을 그린 솔거(率居)는 너무나 유명하다.
이밖에도 경주 남항사(南巷寺)의 11면관음도, 내제석원(內帝釋院)의 미륵상, 흥륜사 벽에 정화(靖和)와 홍계(弘繼)가 그렸다는 보현보살 벽화 등이 기록에 보이고 있다. 이들 불화들의 양식은 당시의 조각과 같은 양식을 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것은 최근 발견된 대방광불화엄경변상도(大方廣佛華嚴經變相圖, 744∼745년, 호암미술관 소장, 국보, 1979년 지정)를 통하여 알 수 있다. 자색(紫色)으로 물들인 닥종이에 금은니(金銀泥)로 불상 · 보살상 · 역사상 등을 그렸다. 유려한 필선과 정교하고 화려한 세부 표현 양식 등은 이 변상도의 우수함을 말함과 동시에 8세기 통일신라 불교 회화의 높은 수준을 입증하고 있다.
고려시대는 역대를 통하여 많은 사원을 건립하였으므로 수많은 불화가 조성되었다. 또한 불교 회화가 새로운 면모를 과시한 시대이다. 그러나 국내에는 몇 점의 작품만 전하고 거의 일본에 전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사경변상도(寫經變相圖)나 불경 판화를 통해서 이 시대 불교 회화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
우선 벽화로는 영주 부석사의 조사당 벽화를 주목할 수 있다. 이 벽화는 묵서명에 의하여 1377년 작으로 밝혀졌다. 조사당의 조사도를 호위하던 범천 · 제석천과 사천왕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범천 · 제석천의 정적이고 유려한 선묘(線描 : 선으로만 그림), 사천왕상의 힘찬 동적인 구성과 표현력 등은 고려 불화가 지니는 격조 높은 예술성을 잘 반영해 주고 있다.
현재 일본에 전하는 고려 불화는 대체로 관경변상도 · 미륵변상도 등의 변상도와 아미타도 · 양류관음도 · 지장보살도 및 지장시왕도 등 다양한 작품들이다.
이들 중 화기가 있는 작품 가운데 가장 연대가 올라가는 것은 1286년 작의 아미타여래도이다. 중생을 제도하고 있는 아미타여래의 활기찬 모습이 화려하면서도 박력 있는 필치와 표현을 보여 주는 걸작이다.
또한 동경 아사구사사(淺草寺)의 「양류관음도(楊柳觀音圖)」는 특히 주목되는 작품이다. 섬세 유려한 고려 불화의 특색이 화면 전체에 잘 조화되어 매우 아름답고 귀족적인 기풍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서구방(徐九方)이 그린 「양류관음도」(1323년)는 해변가 바위 위에 반가부좌 자세로 앉아 선재동자(善財童子 : 求道의 보살 이름)를 내려다보는 모습의 관음보살을 그린 것이다. 이러한 도상을 가지는 유사한 그림들이 일본에 많이 전하고 있다.
이밖에도 동경(東京) 세이카당(靜嘉堂)의 「지장시왕도」, 1306년에 그려진 「아미타여래도」(根津美術館 소장), 1309년의 「아미타삼존도」(上杉神社 소장), 1320년의 「아미타팔대보살도」(奈良松尾寺 소장), 지온원(知恩院)과 서복사(西福寺)의 「16관경변상도」 및 젠도사(善導寺)의 「지장보살도」 등이 주목되는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또한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노영(魯英) 작의 「아미타팔대보살도(阿彌陀八大菩薩圖)」를 주목할 수 있다. 이것은 검은 칠 바탕의 병풍(漆屛)에 금니로 그린 것이다. 그림의 체제는 사경변상도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그림의 주위를 금강저(金剛杵 : 악마를 깨뜨리는 무기)로 결계(結界)하고 있다. 이 그림은 화기가 있어 1307년 선원사(禪源寺)의 반두(班頭) 노영이 그렸음을 알 수 있다.
이 시대의 사경변상도로는 「화엄경변상도(趙明基 소장)」, 광덕사의 「법화경변상도」 등을 특히 주목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작품으로 상당수의 불화가 전해지고 있다. 이들은 대체로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2기로 나누어 고찰될 수 있다. 전기의 작품은 그리 많은 편은 아니나 후기의 작품들은 전국 사찰에 많은 수가 전해지고 있다.
먼저 전기에 속하는 것으로서 무위사(無爲寺) 극락전의 벽화를 들 수 있다. 이들은 본존 후불벽에 아미타후불 벽화와 그 뒷면에 있는 수월관음도 그리고 좌우벽에 있는 아미타내영도(阿彌陀來迎圖)와 석가설법도 등으로 나누어져 있다.
중앙의 아미타후불 벽화는 미타 좌우에 관음과 지장보살을 배치하였다. 그 위에는 각각 3분씩 6분의 제자상을 나타냈다. 고려 불화에서 보이던 복잡하고 화려한 묘선이 많이 간명해지긴 하였으나 아직도 섬세하고 우아한 화풍을 간직하고 있는 조선 초기의 우수작에 속하는 작품이다.
뒷벽의 관음도는 버들가지와 감로병(甘露甁)을 들고 큰 원형 광배를 등지고 서 있는 관음보살을 그린 그림이다. 흰 천의를 나타낸 먹선의 힘찬 필세와 당당한 기풍은 참으로 명공의 절묘한 표현 수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또 아미타내영도는 중앙의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8대보살의 입상을 나타내었고 그 뒤쪽에 성문(聲聞)의 제자상이 보인다. 그리고 석가설법도는 석가와 문수 · 보현의 양대 보살 및 아난 · 가섭을 위시하여 제자상과 두 보살이 보인다. 이 무위사 벽화는 1476년(성종 7) 작으로 조선 초기 불화 양식을 파악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밖에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1565년(명종 20)의 「약사여래삼존도」 역시 조선 초기 불화를 대표하는 가작으로 꼽히고 있다. 그리고 전기에 속하는 탱화로서 일본 등 국외에서 전하고 있는 것이 몇 점 알려져 있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불교 회화는 새로운 양식 변화를 겪게 된다. 임진왜란 당시 사원은 승병(僧兵)들의 본거지였다. 그러므로 극심한 피해를 입어 이 시대 불교 미술, 특히 회화는 완전히 불타 버렸거나, 아니면 왜인(倭人)들이 닥치는 대로 약탈하여 큰 피해를 입었다.
초토화된 사원이 그나마 다소 복구 또는 중창되어 영 · 정조시대에 이르러 불교 미술은 새로운 발달을 보게 되었다. 오늘날 전국의 사찰에 전해지는 대부분의 불화는 이 시대 이후의 작품들이다.
이들은 대체로 일정한 양식 속에서 구도와 형태 그리고 채색 등이 전대와 다른 양식적 특징을 보인다. 즉, 고려의 불화가 주존과 협시보살과의 2단 구성임에 비하여 이 시대에는 이러한 구도가 점차 무시되면서 화면에는 보살 · 사천왕 등 많은 구성 인물이 등장한다. 또 전대의 탱화가 주로 홍색을 많이 사용하였음에 비하여 이 시대에는 연분홍 계통과 녹색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봉정사 극락전의 「아미타후불탱화」(1712년), 운흥사 「팔상탱화」(1719년), 직지사 대웅전의 「삼신후불탱화」(1744년)(보물, 1980년 지정), 화엄사 대웅전의 「삼신후불탱화」(1757년), 장곡사의 「영산탱화」(1759년), 통도사의 「삼장탱화」(1792년) 그리고 동화사 극락전의 「후불탱화」, 쌍계사 대웅전의 「삼신후불탱화」 등 수많은 탱화를 열거할 수 있다.
사경변상도 가운데 초기에 속하는 것은 내소사 소장 『백지묵서 묘법연화경』(보물, 1963년 지정)의 변상도가 있다. 전대의 광덕사 전래 변상도 등에는 미치지 못하나 아직까지 고려시대의 양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중요한 변상도로서 1415년 작이다.
이들 사경변상도는 시대가 내려감에 따라 전대에 비하여 그 섬세도가 떨어질 뿐만 아니라 재료에 있어서도 장지(丈紙) 또는 백지가 등장함을 볼 수 있다.
불교 공예품은 대체로 의식을 위하여 사용되는 불구(佛具)로서, 그 양에 있어서나 질에 있어서 매우 다양하다. 이들은 대체로 동종(銅鐘) · 향로(香爐) · 금고(金鼓) 그리고 사리 장엄구(舍利莊嚴具) 등으로 나누어진다.
불교 공예품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범종(梵鐘)이다. 신라 범종은 그 세부에 있어 중국이나 일본과는 뚜렷하게 다르며 그 양식은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에 걸쳐 ‘한국종(韓國鐘)’이라는 특유의 형식을 보여 주고 있다.
전체 모양은 둥근 통형을 이루었는데 어깨 부분과 아래쪽에 상대(上帶) · 하대(下帶)라 불리는 문양대를 테처럼 두르고 있다. 또 상대에 붙여서 네 곳에 유곽(乳廓)이라고 불리는 4각형 속에 9개의 유두(乳頭)가 달려 있다.
그 아래쪽 종복(鐘腹)에는 2개의 당좌(撞座)와 함께 두 곳에 비천상(飛天像)을 상대하여 배치하고 있다. 종을 매다는 곳에는 허리를 구부린 한 마리의 용(龍)을 두는데 이를 용뉴(龍鈕)라고 한다. 또 그 옆에는 원통형의 용통(甬筒)을 세우고 있다.
특히 신라 범종에 나타나는 아름다운 비천상의 조각은 한국의 독창적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한국 범종의 우수한 제작 기술이나 형태 그리고 장식 무늬의 아름다움 등은 동양의 여러 불교 국가에 비하여 월등히 우수함을 볼 수 있다.
그 가운데서도 771년 성덕대왕 신종(국보, 1962년 지정)은 크기에 있어서는 물론, 형태에 있어서도 세부의 조각에 이르기까지 한국 금속 공예의 걸작이라 할 것이다.
이와 함께 725년 상원사 동종(국보, 1962년 지정)은 국내에 완존한 2구의 신라 범종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음향에 있어서도 가장 아름답고 우수하다.
또 문헌에 보이고 있는 신라 황룡사의 49만근에 달하는 대범종의 주조 사실은 신라 금속 공예의 비상한 발달과 그 우수성을 단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다. 이밖에 신라 범종으로서는 실상사범종과 선림원지종(禪林院址鐘)이 파종된 상태로 전해지고 있다.
고려시대의 동종은 신라의 수법을 충실히 지키고 있으나 대체로 10세기 이후의 범종은 그 문양이나 형태가 전대와 달리 축소되고 섬약해짐을 볼 수 있다.
또 비천상도 다소 조잡해지고 있어 대체로 주소술의 퇴화와 함께 문양대의 비정상적인 증대라든지, 비천과 종신 면적과의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엉성한 구성을 보게 된다. 또한 고려시대의 범종 중에는 30㎝ 내외의 소종이 등장하여 공예적인 성격을 지니게 되는 것도 있다.
이 시대의 동종으로는 1010년 천흥사 동종(1010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1222년 내소사 고려동종(보물, 1963년 지정) · 대흥사에 보존된 탑산사 동종(보물, 1963년 지정) 및 용주사범종(국보, 1964년 지정) 등을 주목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동종으로는 1462년 흥천사범종(보물, 2006년 지정), 1469년 봉선사 동종(보물, 1963년 지정) 등 다소 거종(巨鐘)이 전래하고 있어 주목된다. 이밖에 갑사동종(보물, 1968년 지정)을 위시하여 상당수의 범종을 대소 사찰에서 볼 수 있다.
다음으로 불교 공예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고려의 입배형(立杯形) 향로이다. 이 향로는 유독 고려시대에 성행하여 범종 다음으로 주목되는 불교 공예품들이다. 보통 향완(香埦)이라 불린다. 이들은 모두 고려시대의 것으로서 둥근 신부(身部)와 대좌(臺座)로 구분된다.
전면에 연화 · 보상화 · 용 등의 문양과 함께 범자(梵字)를 새기는데, 이들은 입사(入絲) 수법으로 화려한 효과를 나타내었다. 즉 은(銀)으로서 무늬를 나타내기 때문에 보통 은입사향로(銀入絲香爐)라고 부른다.
과연 이와 같은 향로가 신라시대에도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단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와 같이 아름다운 공예품을 남기게 된 것은 역시 고려인들의 착상이다.
고려 향로 중 특히 우수한 수법을 보이는 것으로는 우선 1177년 표충사 청동 은입사 향완(국보, 1962년 지정)을 꼽을 수 있다. 이는 높이와 너비의 비례가 극히 아름다우며 또 은입사의 수법이 뛰어나 주목된다.
굵은 원 속의 범자, 구름 속의 용무늬, 연꽃무늬 등으로 전면을 꽉 채운 무늬는 세밀할 뿐만 아니라 굵고 가는 선을 적당히 배합하여 훌륭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또한 구연부(口緣部) 안쪽 면에 50여 자의 은입사 명문이 있다.
이들 은입사향로들은 대체로 그 형태가 같고 양식 수법도 동일하다. 이 시대의 중요한 향로들은 통도사 청동 은입사 향완(보물, 1963년 지정), 1344년 봉은사 청동 은입사 향완(보물, 1963년 지정), 마곡사동제은입사향로 등을 꼽을 수 있다.
조선시대의 대표적 향로는 1584년 백장암 청동 은입사 향로(보물, 1963년 지정)를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고려 이래 향로의 형식을 충실히 이어받은 가작이다. 형태는 위의 구연부가 다소 넓게 퍼졌으며 신부에는 당초문(唐草文 : 덩굴무늬)을 비롯한 연꽃 · 동심원 등을 새겨 범자를 넣었으며 명문이 있어 절대 연대를 명시하고 있다.
일명 금구(禁口) 또는 반자(飯子)라고도 불리는데 금속으로 만든 북과 같은 데서 금고라는 말이 유래한 듯하다. 금구에 대한 어원은 잘 알 수 없으나 반자는 사찰에서 이를 쳐서 공양 시간을 알림으로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생각된다. 형태는 둥근 대야같이 생겨 한 쪽만을 치게 된다.
넓은 구연부에 전이 달려 있으며 크기는 지름이 대체로 40㎝ 내외이고 표면에는 장식 무늬를 새겼다. 무늬로는 당초문 · 연화문 등을 주로 시문하여 명문은 대체로 측면에 음각으로 연대 · 사명(寺名) · 축원문 · 무게 등을 기록한다.
신라시대의 금고로는 함통6년명금고가 있다. 이는 매우 희귀한 신라시대 금고로서 표면에는 굵고 가는 줄을 번갈아 가면서 동심원을 쳤을 뿐 장식 무늬가 없다. 위쪽에는 고리 두 개가 붙어 있고 명문이 있어 865년(경문왕 5)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의 금고는 조사된 것만도 약 40구가 된다. 그들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경암사금고(1073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중흥사금고(1103년, 호암미술관 소장) · 자복사(資福寺)금고(1207년, 경희대학교박물관 소장) · 포계사(蒲溪寺)금고(1202년,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소장) · 을사명금고(동국대학교박물관 소장) 등을 꼽을 수 있다.
사리 장엄구는 탑파에 봉안되는 사리를 장엄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사리기(舍利器)를 통틀어 말한다. 또 이들과 함께 탑 내에서는 법사리(法舍利)로서 불경 등을 볼 수 있다.
이중 경주 불국사삼층석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은 750년경의 것으로 세계 최고의 목판 인쇄 경전임이 밝혀졌다. 때로는 불경과 함께 불상이나 소탑(小塔)도 같이 발견된다.
그러나 가장 주목되는 것은 역시 사리를 직접 납치(納置)한 사리병(舍利甁)과 더불어 이를 다시 넣게 되는 금동제 등의 사리함이다. 보통 사리함은 내함과 외함으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드문 예로는 분황사탑에서와 같이 가위 · 침통 등을 함께 넣기도 하며, 동경(銅鏡)이나 청동비천상 그리고 금으로 만든 발(鉢) · 옥(玉) 등의 장식구들을 넣기도 한다.
따라서 이들 사리장 엄구는 당시의 금속 공예의 발달상을 짐작하는 데도 귀중한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탑파의 연대 추정에도 매우 중요하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먼저 신라시대에 있어서는 경주 황룡사목탑사리구, 감은사 서쪽 삼층석탑사리기(보물, 1963년 지정), 불국사삼층석탑사리장지(국보, 1967년 지정), 경주 구황동삼층석탑사리기, 칠곡 송림사오층전탑사리기(보물, 1963년 지정) 등을 들 수 있다. 고려의 작품으로는 먼저 왕궁리오층석탑사리기(국보, 1966년 지정)를 그 대표적인 예로 볼 수 있다.
여기서 발견된 일괄 유물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것은 금제금강경판(金製金剛經板)이다. 길이 14.8㎝, 너비 13.7㎝의 금판 각 장에 1행 17자의 금강경을 뚜렷하게 양각한 19장의 유품이다.
조선시대의 사리구로서는 크게 주목할 만한 것이 없다. 다만 간혹 귀족들의 발원에 따라서 봉안된 것으로 보이는 수정사리기나 염주, 또는 은제도금사리 등이 보인다. 그러나 이 시대의 작품 가운데 법주사팔상전에서 발견된 사리구는 현존 유일의 목탑사리구로서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이다.
즉 은제도금사리호(높이 4㎝)와 금동환(金銅環, 직경 12.7㎝), 명문이 새겨진 금동판 5매이다. 명문은 각판 내외에 점각(點刻)된 것으로, 이 탑이 1605년(선조 38)에 중수된 사실과 사명(四溟)이 관여한 사실 등을 알려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