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부석사 조사당은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사에 있는 고려 후기 승려 원응국사가 중건한 사찰 건물이다.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작은 건물로, 기둥 위에만 공포가 있는 주심포 건물이다. 건물은 맞배지붕이다. 조사당 내부에는 절의 창건주인 의상스님의 상을 봉안하고 있다. 조사당 앞 처마 밑에는 의상스님의 지팡이가 자란 것이라는 골담초가 있다. 부석사 조사당은 고려 말, 조선 초기의 건축수법을 보여준다. 또 조사당 벽화(국보)는 남아 있는 벽화 중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회화사적으로 중요하다.
부석사 조사당은 창건연대가 확실하지 않다. 장여(長欐)에 기록된 묵서(墨書)에 따르면 1377년(우왕 3) 원응(圓應)국사가 다시 세웠고, 1490년(성종 21)에 중수하였다고 한다. 이후 조사당은 부분적인 보수만 있었을 뿐 큰 변화가 없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1573년(선조 6)에는 지붕을 보수하였으며 1709년(숙종 32)에는 기와를 교체하였다. 1916년에 해체 수리가 이루어졌는데 이때 장여에서 고려시대 중건과 조선 초기의 공사 내용이 기록된 묵서가 발견되었다. 1985년에는 벽화를 모사하여 복원하였으며, 1994년에 벽화전시관을 건립하였다. 1996년에는 서까래와 기와를 교체하였고, 2005년에 도리 등 부식된 목재와 함께 기와를 교체하였다.
부석사 조사당은 무량수전의 북동쪽 언덕 위에 세워져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작은 건물로서 기둥 위에만 공포가 있는 주심포 건물이다. 기단은 면석과 갑석으로 조성하였고 그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았다. 기둥은 약간의 배흘림이 있는 원기둥을 사용하였다. 공포는 외부에 출목이 있는 간단한 형식으로 장식이 없다. 첨차(檐遮)는 상부 공안(栱眼)을 완전히 따내 확실하게 눈에 띈다. 가구 구조(架構構造)는 5량 구조로서 제공 위에 대들보를 걸치고 그 위에 포대공을 놓아 종보를 받쳤다.
종보 위에는 사다리꼴 모양의 대공과 소로를 놓아 종도리 장여와 종도리를 받게 했으며, 종도리 하부에는 인(人)자 모양의 솟을합장을 결구하였다. 솟을합장은 종보의 윗면을 비스듬히 파내고 솟을합장을 꽂은 후 쐐기를 박아 튼튼하게 결구하였다. 지붕은 맞배지붕이다. 정면 처마는 서까래와 부연을 사용한 겹처마이고 배면 처마는 서까래만 사용한 홑처마이다. 건물 내부 바닥에는 본래 전돌을 깔았으나 지금은 참배가 편리하도록 마루를 설치하였다.
부석사 조사당은 작은 규모의 주심포 건물로서 공포 형식이 특색 있다. 공포는 위아래 소로의 위치가 일치하지 않으며 살미(山彌)와 첨차를 깎아 낸 수법도 독특하다. 외목도리 하부는 첨차가 없이 살미가 직접 외목도리를 받는다. 이처럼 외목도리 하부에 첨차를 사용하지 않는 건물은 안동 봉정사 극락전(국보, 1962년 지정)과 영암 도갑사 해탈문(국보, 1962년 지정) 등 고려 말∼조선 초기의 건물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다. 대들보와 종보는 단면이 항아리 형태로서 윗면의 모접기가 거의 없다. 대들보의 보머리는 위쪽이 아래보다 넓게 하고 삼분두(三分頭)로 깎았으며 종보의 폭과 높이는 2:3의 비율을 보여주고 있다. 보의 단면 비율과 다듬기 방법은 다른 건물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모습이다.
평면은 고대 건축에서 사용하던 엄격한 비례체계에서 벗어나 완척(完尺) 위주로 평면을 설정하는 경향으로 변화해가는 과도기적 양상을 지니고 있다. 창호는 정면 가운데 칸에만 출입문을 달고, 좌우 협칸에는 살창을 설치하였으며, 나머지 삼면은 벽으로 처리하였다. 이러한 창호 구성 형식은 오래된 건축 수법인데 조선 초기의 건물인 영천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국보, 1962년 지정)에서 볼 수 있다.
부석사 조사당은 평면 계획과 가구 구조, 부재의 형태와 치목 방법 등이 고려 말 조선 초기의 건축수법을 보여주고 있으며 비슷한 시기의 건축물과 달리 장식이 절제되어 있다. 또한 부석사 조사당 벽화(국보, 1962년 지정)는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벽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회화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