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높이 1.74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미륵보살입상과 함께 경상북도 경주시 내동면 신계리 감산사지에 있었던 것을 1915년에 서울로 옮겨왔다. 전형적인 등신대 불상인데 광배 명문에 의하면 719년경에 당시 집사성 시랑을 지낸 김지성(金志誠)의 발원으로 조성된 것이며 양식면에서는 8세기 전기에 속하는 작품이다.
불신 · 광배 · 대좌의 세 부분으로 구성된 이 불상은 불신과 대좌의 높이 비율이 3:1이고, 등신대의 불신에 적당한 광배로 전체적인 구도가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렇게 균형을 이룬 구도는 형태에서도 잘 나타나 머리와 불신의 높이 비율이 1:4로, 굴불사지석불상의 아미타상과 함께 인체 비례에 가까운 사실적 표현인 것이다.
비록 정면에서 보면 엄격한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는 강건한 풍모의 석불입상이지만 부풀고 풍만한 얼굴에 눈 · 코 · 입은 세련되게 표현되어, 국립경주박물관 소장의 사암불입상(砂巖佛立像) 같은 이국적인 과장이 나타나지 않는다. 즉, 신라의 토속적인 얼굴을 사실적으로 잘 묘사하고 있다.
떡 벌어진 가슴과 팽팽한 어깨, 당당하게 버티고 선 위엄 있는 자세 등은 감각적인 사실주의 표현과는 거리가 있다. 얼굴이나 신체의 묘사에서 자비스러우면서도 당당한 부처님의 위엄을 인간적으로 표현하고자 한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주형 거신광배(舟形擧身光背)를 등지고 있는 이 불상은 당당하고 위엄 넘치며, 비교적 두꺼운 옷 속에 감싸여 있어서 가슴의 두드러진 표현은 없다. 하지만 신체 각 부분의 탄력적인 모습과 함께 박진감이 넘치는 표현은 인체를 이상적인 불신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이 불상은 통견(通肩)의 대의(大衣)를 전신으로 걸치고 U자형의 주름이 상체에 유려하게 흐르다가 다시 양쪽 다리로 각각 내려가서 옷주름을 이루고 있다. 두 다리의 U자형 옷주름과 함께 목의 옷깃을 한 번 뒤집는 반전수법(反轉手法)은 전형적인 우드야나(udyana, 優塡王像)식 착의법이라 부르고 있는 것으로, 신라 불상에서는 이 불상이 대표적인 예가 된다. 이 불의는 약간 두꺼우면서 악센트를 강하게 넣었기 때문에 전체적인 불상 형태와 함께 불상 자체도 박진감 나도록 하는 요인이 된다.
불상 광배 뒷면에 새긴 21행 391자의 불상 조성기는 이 불상이 법상종 사찰의 강당에 모시던 아미타불임을 밝히고 있어 금당주존(金堂主尊) 미륵보살과 함께 당대 법상종의 신앙을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 불상은 통일신라시대에 완성된 이상적인 사실주의 양식을 보여 주는 가장 대표적인 예일 뿐만 아니라 명문에 의해 조성 연대와 발원자가 분명히 밝혀진 불상으로서 우리나라 조각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