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남산의 능선을 따라 형성된 용장사지 빈 터의 삼층석탑형 대좌 위에 안치되어 있는데 머리 부분은 없어졌다. 1923년 봄, 대좌에서 굴러 떨어진 것을 복구하였다고 하며, 9년 뒤인 1932년 다시 도괴된 것을 그 해 11월에 제자리에 올려놓았다고 한다. 그 때 벌써 목이 부러져 있었고 3층 대좌가 거꾸로 놓여 있었기 때문에 그 이전에 한 번 더 도괴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머리가 없어졌기 때문에 승형(僧形)으로 추정하는 설도 있고, 『삼국유사』 현유가조(賢瑜伽條)에 기록된 용장사의 보살형 미륵상인 미륵장육상(彌勒丈六像)으로 추정하는 설도 있다. 후자의 설이라면 신라 경덕왕 때인 8세기 중엽의 불상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머리 부분이 없으므로 불상의 이름과 양식을 분명히 알 수 없다.
불상의 목 아래 부분은 비교적 보존 상태가 좋고, 불상이 앉아 있는 상대석(上臺石)과 하나의 돌로 구성되어 있다. 어깨는 좁은 편이지만 당당함을 보여 주고 있으며, 몸의 굴곡은 세세하게 나타나지 않았지만 균형 잡힌 신체가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앉은 자세는 결가부좌(結跏趺坐)이며 수인(手印)은 특이하게 오른손을 오른쪽 무릎 위에 올려놓고 왼손을 왼쪽 무릎 위에 자연스럽게 놓아, 언뜻 보면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좌우로 바꾸어 놓은 듯한 모양이다. 이러한 사실적인 체구의 표현은 석굴암의 감실상(龕室像)이나 8세기 중엽 불상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옷은 통견의(通肩衣)이며 옷자락 선은 조각도로 깎은 것처럼 처리되었으며 자연스러운 옷주름이 표현되었다. 가슴에는 승각기(僧脚岐)의 깃이 굵게 표현되어 있고 이것을 묶는 띠 매듭까지 나타나 있는데, 이러한 특징은 경주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柏栗寺金銅藥師如來立像), 경주 남산 칠불암 사면불상(慶州南山七佛庵四面佛像)의 것과 유사하다.
왼쪽 어깨에도 또 하나의 띠 매듭이 있는데, 이것은 가사(袈裟)를 묶는 띠로서 어깨 뒤쪽의 고리에서 어깨로 내려와 무릎 아래까지 이어져 있고, 그 끝은 수술로 장식되어 있다. 이 가사 띠는 대개 승려의 초상화에 표현되는 것으로, 경주 남산 삼릉계(三陵溪)의 목 없는 불상 등 드물게 불상에도 나타나고 있지만 이것은 석굴암 감실의 지장보살상 같은 승려형의 상에 주로 표현된 특징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옷자락이 대좌를 덮어 내린 상현좌(裳懸座)는 앞과 양옆에만 나타나고 뒤쪽에는 연화문이 표현되었다. 상현 주름은 복잡하지만 명쾌하게 처리되었으며, 연화문 역시 깔끔한 모양을 보여 주고 있다. 3층으로 구성된 대좌(臺座)는 기단부가 자연석이고, 간석(竿石)과 대좌가 탑신(塔身)과 옥개석(屋蓋石) 모양으로 구성되고 있는데, 모두 특이한 형태의 둥근 모습을 하고 있다.
석굴암 감실상들과 친연성(親緣性)이 강한 조각으로, 간명하며 세련되고 긴장감 넘치는 사실주의적 양식을 보여 주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