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높이는 본존불 2.78m, 좌협시보살 2.35m, 우협시보살 2.93m. 새로운 추상표현주의적 기법으로 조성된 7세기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 넘어진 것을 1923년에 지금과 같이 삼존상으로 복원한 것이다.
중앙의 본존은 큼직한 돌을 평평하게 다듬고, 앞면은 부조 형식으로 조각한 우람한 체구로, 커다란 자연석 위에 묵중하게 서 있다. 이 묵중함은 단순한 묵중함과는 달리 시혜자(施惠者)의 활력을 명쾌하게 풍겨 주는데, 이러한 특징은 이 불상의 모든 세부 특징에서도 지적해낼 수 있다.
머리카락은 나발(螺髮)인데 3단으로 이루어진 상투의 머리카락 표현은 보이지 않아 매우 특징적인 모양이다. 얼굴은 사각형으로 뺨을 부풀리고 턱을 완강하게 처리하여 힘과 활력이 나타나 있다. 눈은 눈두덩을 부풀리고 눈을 가늘게 처리함으로써 파격적인 눈웃음을 짓고 있으며, 양쪽 뺨을 한껏 부풀리고 입을 꾹 다물면서 양 끝을 깊게 파서 미소가 얼굴 가득히 흘러 넘치고 있다. 이러한 웃음은 경주 서악동 마애여래삼존입상(보물, 1963년 지정)이나 경주 삼화령 석조미륵여래삼존상 등과 직결되는 것이지만, 그들보다 훨씬 더 허심탄회한 느낌을 주고 있다. 코는 큼직한 삼각형이며 귀는 어깨에 닿아 있지만 끝이 깨어져 형태가 분명하지 않다. 목은 짧은 편으로 삼도(三道)의 표현은 보이지 않는다.
상체는 우람한 면모를 과시하지만, 하체는 불분명한 다리의 윤곽 등으로 빈약하게 보여 불균형을 이루고 있다. 어깨의 팽팽한 윤곽 외에 가슴 등은 평평하지만, 다리의 볼륨이 약간 표현되었다. 시무외·여원인을 취한 두 손은 적당한 크기이며, 두 발도 앞 시대의 다른 불상에 비하면 비교적 잘 처리한 편이지만, 아직도 너무 크고 발꿈치를 들고 서 있는 것처럼 불안정하게 처리하였다. 옷은 통견의(通肩衣)를 입고 있는데, 오른쪽 어깨에 가사 자락을 약간 덮고, 팔에 걸친 옷자락은 짧고 묵중하게 내렸다. 그 밑으로는 광배에 해당하는 면 전체로 옷자락이 덮이며 내려갔다. 가슴에서 발목까지는 U자형의 옷주름 다섯 가닥이 표현되었는데, 굵은 凸형의 띠로서 매우 특징적인 것이다. 이것은 7세기 초기의 익산 연동리 석조여래좌상(보물, 1963년 지정)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새로운 수법임이 분명하다.
광배는 얼른 보면 없는 것 같지만, 뒷면을 보면 주형 광배(舟形光背)인 것이 뚜렷하다. 앞에서 보면 얼굴 주위에서 어깨까지만 분명히 알 수 있으나, 두 다리 옆의 옷자락에 가린 면도 광배인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즉, 광배를 불상의 신체에 거의 맞게끔 처리하여, 광배로서의 기능보다는 불상을 지탱해주는 구실을 더욱 충실하게 하고 있는 것 같다.
대좌는 현재 자연석을 대신 사용하고 있는데, 바로 앞에 놓인 돌이 원래의 대좌였던 것으로 보이며, 오른쪽에 놓인 파편도 대좌의 일부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위에 연꽃대좌가 놓였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발굴할 때 세 조각으로 깨어진 부분이 출토되었다.
이 불상의 짧은 체구, 두 무릎을 약간 굽힌 자세, 아기 같은 얼굴 등 투박하고 어린이 같은 특이한 형태는 중국의 북주(北周) 내지 수나라 불상과 유사한 추상표현주의적 양식을 보여준다. 이러한 특징은 좌우 협시보살상의 형태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왼쪽 보살은 약간 더 늘씬하고 세련된 듯하지만, 기본적으로 오른쪽 보살과 흡사하다. 오른쪽 보살상은 양감 있고 탄력적인 얼굴, 막 터져 나올 듯한 순진무구한 미소, 어린이 같은 짧은 체구, 묵중하고 장식적인 목걸이 등의 장신구, 5구의 화불(化佛)이 새겨진 원형의 두광배(頭光背), 앙련(仰蓮: 위로 향하고 있는 연꽃)과 복련(覆蓮: 아래로 향하고 있는 연꽃)이 새겨진 묵중한 대좌 등 기본적으로 본존불과 동일한 형태이면서 그보다는 좀 더 장식적이다.
이 삼존불상은 몇 가지 점에서 우리나라 조각사상 중요한 의의가 있다. 본존불상의 경우에는 형식을 단순화하였는데, 보살은 장식적이며, 나발이라든가 묵중한 불의, 굵은 띠 같은 새로운 세부 형식을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불상의 양식적 특징으로 아기 같은 얼굴과 체구, 묵중하고 단순화된 선 등에서 새로운 추상표현주의적 특징을 보여주는 7세기의 1/4 분기 작품으로, 삼국시대 신라 조각을 대표하는 대작이자 걸작품이라는 점이다. 또한 이 삼존상은 섭론종(攝論宗: 중국 불교의 학문적 종파의 하나) 계통의 아미타불과 관음·세지보살의 아미타삼존불일 가능성이 있어서 삼국시대 불교사에 중요한 자료가 되며, 600년에 중국에서 귀국한 원광(圓光) 등에 의하여 수용되었을 가능성이 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