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성(金志誠)의 아버지는 일길찬(一吉飡) 인장(仁章: 金仁章)이며, 어머니는 관소리부인(觀肖里夫人)이다. 벼슬길에 올라 중아찬(重阿飡)의 관등에 올랐으며, 67세에 집사부시랑(執事部侍郞) 직에서 물러났다. 정계에서 은퇴한 뒤 경주의 서남쪽(『삼국유사(三國遺事)』에 동남쪽으로 되어 있으나 잘못된 것 같음) 20여 리에 전장(田莊)을 희사하여 감산사(甘山寺)를 창건하고, 그 안에 미륵상(彌勒像: 甘山寺石造彌勒菩薩立像)과 아미타상(阿彌陀像: 甘山寺石造阿彌陀佛立像)을 안치하였다.
감산사 미륵상·아미타상의 광배(光背)에는 각각 명문(銘文)이 있는데, 이를 통해 그의 행적에 대해 살펴볼 수 있다.
「미륵상화광후기(彌勒像火光後記)」에는 발원자를 김지성으로, 「아미타상화광후기(阿彌陀像火光後記)」에는 김지전(金志全)으로 달리 표기되어 있다. 그런데 당시에는 한자의 음(音)을 빌어 사람들의 이름을 표기하면서 동일한 사람이라도 다른 글자가 사용되는 사례가 많아 동일 인물로 여겨지고 있다. 김지성이 최고로 오른 관등이 6두품(六頭品)에서 올라갈 수 있는 상한의 관등인 중아찬이라는 점, 사망한 부친의 마지막 관등이 일길찬이고, 동생이나 서형(庶兄) 등의 관등이 각각 소사(小舍)·일길찬·사찬(沙飡)·대사(大舍) 라는 점 등에서 김지성 가문은 비진골(非眞骨)인 6두품 가문으로 여겨지고 있다.
「미륵상화광후기」에 “불제자 지성은 좋은 세상에 태어나 높은 벼슬을 살았는데, 지략이 없어 세상을 바로잡아 보려다가 형벌을 받을 뻔했으나 간신히 면했다”라고 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그는 삼국통일 직후의 어느 시기에 개혁적인 정치를 해 보고자 노력한 상당히 의욕적인 인물이지만, 그의 개혁 정치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압력을 받아 좌절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성덕왕(聖德王) 4년에는 중국에 사신으로 파견되었고, 상사봉어(尙舍奉御)라는 관직을 수여받으며, 은퇴할 무렵에는 집사시랑(執事侍郞)을 역임하는 등 중앙 정계의 핵심에서 왕의 신임을 받으며 관직생활을 영위하였다. 김지성이 감산사를 세우고 국왕의 복락(福樂)을 빈 것이나, 왕명으로 감산사 두 불상의 봉안을 위한 명문을 찬(撰)하게 된 점 등에서도 김지성이 당시 성덕왕과의 관계가 각별했음을 보여준다. 성덕왕대 탄탄한 관직생활을 걸어왔던 김지성은 67세에 은퇴하였는데, 불교와 노장사상(老莊思想)에 심취해 있었다. 자신의 경제적 기반인 감산장전(甘山莊田)을 희사하여 감산사를 건립한 것도 이러한 분위기의 연장이었다.
「미륵상화광후기」에 “그는 성품이 원래 자연을 좋아해 노자(老子)·장자(莊子)의 유유자적함을 사모했으며, 진종(眞宗)을 중하게 여겨 무착보살(無著菩薩)의 참다운 진리를 희구한다”라고 하였다.
「아미타불상화광후기」에도 그에 대해 “67세에 벼슬을 버리고 세상을 피해 한적한 곳에 살면서, 고상한 신선을 사모하고 영화로움을 버려 성품을 배양함으로써 소광(疏廣)과 소수(疏受) 형제가 때를 보아 벼슬을 버린 것같이 하였다. 무착보살의 참다운 종지를 우러러 사모해 때때로 미륵보살의 유가론(瑜伽論)을 읽고, 또한 장자의 현묘한 도를 사랑해 날마다 소요편(逍遙篇)을 보아 이로써 어버이의 은공(恩功)을 갚고자 하였다”라고 하였다.
신라 중대에 개혁정치를 주도하다 뜻대로 되지 않자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귀족들 사이에 노장사상이 퍼져 나가고 있었는데, 그가 노장사상에 힘입게 된 것은 신라 귀족들의 이러한 사상 경향과 연관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비록 노장사상을 이해하고는 있었지만 그의 사상의 주류는 역시 불교, 그 중에서도 특히 유식계(唯識系)의 법상종(法相宗)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