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거대한 크기의 이 불상은 북한산 중턱의 고찰(古刹) 승가사 뒤편 바위에 낮은 부조로 새겨져 있는 좌상이다. 승가사는 당나라의 신승(神僧) 승가(僧迦)의 성적(聖蹟)을 얻은 수대(秀臺)가 756년(경덕왕 15)에 삼각산 남쪽에 굴을 만들어 창건하였다고 전해 온다. 불상의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다.
높고 큼직한 살상투[肉髻]를 갖춘 머리는 민머리[素髮]이며, 백호공(白毫孔)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네모꼴에 가까울 정도로 풍만하게 처리된 얼굴에는 오뚝하게 솟은 콧날과 꾹 다물고 있는 입, 가늘게 내려 뜬 눈과 눈썹 등이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두 귀는 어깨에 닿을 정도로 길게 늘어졌다. 목에는 가는 선으로 조각된 삼도(三道)가 희미하게 나타나 있다.
왼쪽 어깨에 걸쳐 입은 우견편단(右肩偏袒)의 법의(法衣)는 넓은 옷깃이 왼쪽 어깨로부터 오른쪽 겨드랑이로 부드럽게 흘러내리고 있다. 옷주름 선은 유려하고 활달하다. 그러나 형식화된 각진 어깨와 밋밋한 가슴 등은 입체감이 결여되어 있다.
팔을 약간 벌려서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손 모양을 하고 있는 손은 당당한 불격(佛格)을 나타내 준다. 뿐만 아니라 오른쪽 손목을 안쪽으로 꺾이게 함으로써 율동적으로 잘 표현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화사한 중판연화문대좌(重瓣蓮花文臺座) 위에서 가부좌한 양 무릎은 넓어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주고 있다. 손 밑의 발은 호화로운 연꽃대좌와는 대조적으로 탄력성을 잃어버린 채 손과 같이 큼직하게 조각되었다.
대좌로부터 시작되는 광배는 굵은 선으로 아무런 장식 없이 조각된 키 모양의 거신광(擧身光)이다. 머리 위에는 개석(蓋石) 아랫면에 연꽃잎과 자방이 아름답게 조각된 팔각형의 다른 돌을 바위에 붙여서 보개(寶蓋)로 삼고 있다. 머리 위쪽 좌우와 양어깨 옆으로 파여 있는 네모꼴의 구멍은 목조전실(木造前室)의 가구(架構) 흔적으로서 마애석굴(磨崖石窟)을 모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풍만하고 당당한 체구에 장중하고 단정하면서도 자비가 넘쳐흐르는 통일신라시대의 마애불상들보다는 다소 둔화되고 형식화된 감이 있다. 하지만 신체 표현은 어느 정도 균형이 잡혀 있으며, 얼굴 표정 또한 부드러움과 자비로움이 잘 간직되어 있는 10세기의 고려시대 불상 양식을 보여 주고 있다.
이 마애불상과 유사한 상으로는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불좌상(大興寺北彌勒庵磨崖佛坐像)과 월출산 마애불좌상(月出山磨崖佛坐像)을 꼽을 수 있으며 고려초에 조성된 마애거불상의 하나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