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1934년 경주 구황동 낭산(狼山)의 동북쪽 기슭에 세워져 있는 삼층석탑을 해체 복원할 때 나온 사리함에서 금제여래입상(국보, 1962년 지정)과 함께 발견되었다. 이 사리함의 뚜껑 안쪽에 새겨진 명문(銘文)에 의하면 통일신라시대 성덕왕 때인 706년에 이 사리함 속에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 및 불사리(佛舍利) 4개와 함께 순금으로 된 아미타상을 넣었다고 하는데, 바로 이 불상이 아닌가 추측된다. 그러나 명문에는 아미타상의 크기가 6치[寸]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실제로 발견된 이 불상은 12.2㎝로 4치도 되지 않아 의문이 간다.
불상 전체는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이 합쳐진 광배와 불신, 연화대좌의 세 부분으로 되어 있고, 각 부분이 분리되도록 만들어져 있다.
불상의 머리는 민머리인 소발(素髮)이고 육계(肉髻)는 비교적 큰 편이다. 양쪽 뺨은 통통하고 얼굴이 둥근 편이며, 눈·코·입의 표현이 뚜렷하고 균형이 잡혀서 이상화(理想化)의 경향이 뚜렷하다. 또한 얼굴에는 약간의 미소를 띠고 있으나 함께 출토된 입상보다는 더 위엄이 있어 보인다. 어깨는 넓고 당당하며 목에는 삼도(三道)의 표현이 뚜렷하다.
옷은 양어깨를 덮은 통견(通肩) 형식으로 앞가슴을 많이 드러내고 그 속에 대각선으로 걸쳐 입은 내의가 보인다. 결가부좌(結跏趺坐)를 한 양다리 위로 법의의 주름이 덮여 있어 신체의 윤곽이 잘 보이지는 않으나, 양무릎의 둥근 부분은 팽팽한 옷주름으로 강조되어 양감을 잘 나타내고 있다. 대좌 위에 덮인 주름은 대칭으로 정돈되어 겹친 부분의 주름이 자연스럽게 늘어져 있다.
수인(手印)은 오른손은 시무외인(施無畏印)을 하고 있고, 왼손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처럼 왼쪽 손바닥을 무릎 위에 놓고 있다. 광배는 두광과 신광이 연결된 판금(板金)으로 두광에는 연화를 중심으로 덩굴무늬와 불꽃무늬가 맞뚫림조각[透彫]으로 되어 있고, 신광은 찍어낸 덩굴무늬 주위에 다시 덩굴무늬와 불꽃무늬를 맞뚫림 조각으로 해놓았다. 연화대좌는 연잎의 가운데에 두 돌기가 나온 겹꽃잎의 연꽃이 위로 향하고 있는 상대와 밑으로 향하고 있는 하대를 원형의 중대가 이어주고 있으며, 대좌의 앞부분이 불상의 옷주름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상현좌(裳懸座)를 이루고 있다.
이 불상에서 보이는 옷주름의 표현이나 불상의 양감이 강조되는 것은 성숙된 당나라의 영향이 반영된 것이며 수인은 당나라 초기 7세기의 불상에 많이 보이는 것으로, 8세기 초의 우리 나라 불상 양식의 성격을 고찰하는 데 매우 중요한 예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