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 선산읍 금동 여래 입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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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 선산읍 금동여래입상
구미 선산읍 금동여래입상
조각
유물
문화재
통일신라시대의 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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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통일신라시대의 불상.
개설

1976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1976년 경상북도 구미시 고아면 봉한2리 뒷산에서 사방공사를 하던 중에 구미 선산읍 금동보살입상 2구(국보, 1976년 지정)와 함께 출토되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 불상들은 본래 발견되기 70여 년 전 어느 농부에 의하여 부근의 ‘대밭골’이라는 곳에서 발견되어 보관되다가, 그 수년 뒤 현재의 발견 장소에 다시 묻은 것이라 한다. 원래의 발견지로 추정되는 대밭골의 뒷산은 삼국시대의 기와 조각과 토기 조각이 많이 출토된 곳이다.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는 절터로 추정된다.

함께 발견된 3구는 모두 약간씩 다른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여진다. 이 중에서 이 여래입상이 가장 늦은 시기에 속하는 것으로, 이 불상은 통일신라시대 여래상의 대표적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내용

이 여래입상은 대좌가 없어진 채 정면을 향한 직립 자세를 취하고 있다. 머리는 몸에 비하여 큰 편이며, 나발(螺髮)로 표현되어 있다. 머리 위에는 크고 뭉뚝한 육계(肉髻)가 솟아 있다. 얼굴은 퉁퉁하게 살이 오른 네모진 모습인데, 예리한 각선으로 눈·코·입이 표현되어 있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나타난다. 손 모습은 여원인(與願印)과 시무외인(施無畏印)인 듯한데 그 끝 부분이 손상되었다.

몸에는 양어깨를 가리는 통견(通肩)으로 된 법의를 걸쳤다. 배 부분에서 평형의 U자형 주름이 표현되었는데, 다리 부분에서 갈라져 각각의 주름을 이루며 발목까지 드리워진다. 두 다리 위의 주름은 서로 대칭을 이룬다. 법의가 몸에 밀착되어 불신의 형태가 뚜렷이 드러난다.

몸 뒤쪽에는 광배를 꽂았던 듯한 굵은 꼭지가 달려 있으며 머리와 등, 다리에는 주조할 때 생긴 구멍이 뚫려 있다.

특징

몸의 형태나 세부 표현은 부드럽고 단순하며, 옷주름이 정리되어서 단정한 인상을 준다. 이와 같은 양식적 요소들은 중국 당나라 초기의 조각 양식과 관계가 있다. 이 여래입상의 형식과 비슷한 신라의 불상으로는 719년의 명(銘)이 있는 경주 감산사 석조아미타여래입상(국보, 1962년 지정)을 들 수 있는데, 이 불상은 통일신라시대에 유행했던 불입상 형식(佛立像形式)을 대표하고 있다.

이 여래입상은 위에서 언급한 법의 형식(法衣形式)의 금동불입상 중에서는 비교적 초기에 해당한다. 8세기 중엽에 이르면 대의와 부처의 몸이 조형적으로 통일감을 이루어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전성기 양식으로 발전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불상은 아직 형태가 단순하고 자세가 굳었으며, 표현 수법에서 긴장감이 느껴지는 점으로 보아 7세기 말에서 8세기 초의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문화재대관』1 국보1(한국문화재보호협회, 대학당, 1986)
「통일신라시대전기의 불상조각양식」(김리나, 『고고미술』154·155, 한국미술사학회, 1982)
「선산 봉한이동 출토 금동여래보살입상 발견시말」(강인구, 『고고미술』129·130, 한국미술사학회, 1976)
관련 미디어 (1)
집필자
김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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