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동 미륵보살 반가 사유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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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
유물
삼국시대의 금동반가사유보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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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삼국시대의 금동반가사유보살상.
내용

전체 높이 17cm, 불상 높이 15.5cm, 대좌 넓이 6.7cm. 프랑스 기메박물관 소장. 1903년에 일본의 불상으로 구입한 것이나 후에 한국 삼국시대의 상으로 분류되었다. 상체(上體)에는 옷을 입지 않았고 목걸이도 없다. 신체의 표현은 가슴이 좁고 허리가 가는 몸매의 한 어린 소년의 모습이다.

보관에는 삼면으로 솟은 장식이 있다. 특히 가운데 부분이 둥글고 높으며 그 속에 조그만 원을 받치는 초승달 형식의 일월(日月) 장식이 보인다. 이러한 일월 장식의 보관은 충청남도 서산마애삼존불의 오른쪽 협시보살이나 반가사유보살상의 보관에도 보인다.

머리는 앞으로 숙이고, 오른손으로 오른쪽 뺨을 받치듯이 대고 있으며 오른쪽 다리는 내려뜨린 왼쪽 다리의 무릎 위에 얹어 놓은 사색의 자세이다. 허리 밑으로 입은 상의(裳衣 : 치마)는 의자 위에 몇 개의 대각선 형태의 주름으로 늘어진 단을 형성하였다. 왼발을 받치고 있는 둥근 대좌에도 아무런 무늬가 없다.

신체의 단순한 표현이나 옷주름의 형태, 무늬 없는 대좌의 모습 등은 삼면 화관을 쓰고 고개를 많이 숙이고 있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금동반가사유상(출토지 미상)과도 비슷하다.

또한 한국계의 불상으로 보는 일본의 호오류지(法隆寺) 헌납 보물 중에 있는 병인(丙寅)년 명(606년으로 추정.)이 있는 금동반가사유상과도 조형적으로 상통하는 점이 있다. 반가사유보살상의 원형은 간다라 조각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중국에도 5세기에 나타난다.

초기에는 흔히 태자의 말 찬타카와 마부 칸타카와 이별하는 장면으로 표현되며 명문에는 흔히 태자사유상(太子思惟像)으로 기록된다. 반가사유보살상은 6세기와 7세기의 삼국시대에 널리 제작되어 신앙되었다. 특히 신라에서는 화랑도와 결부된 미륵 신앙과 연관이 있다고 본다.

경전에는 미륵상이 반가사유 형태로 표현된다는 내용은 없으나 일본의 야쭈지(野中寺, 666년) 금동반가사유상에 미륵이라는 명문이 있어서 삼국시대의 반가사유상 역시 미륵으로 신앙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반가상은 조형적으로 단순하면서도 삼국시대의 반가상에 자주 보이는 특징을 보여 주고 있어서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초기의 상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참고문헌

『パリ·ギメ 美術館 展示會圖錄』(東京 出光美術館,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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