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1층과 2층은 정면 5칸, 측면 4칸이고, 3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된 팔작지붕건물이다. 거대한 미륵존불을 봉안한 불전으로, 일명 용화전(龍華殿) · 산호전(山呼殿) · 장륙전(丈六殿)이라고도 불린다.
1층은 대자보전(大慈寶殿), 2층은 용화지회(龍華之會), 3층은 미륵전의 편액이 붙어 있는 우리나라 유일의 3층 불전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금산사는 백제 법왕 1년(599)에 창건한 대찰로서, 신라 혜공왕 2년(766)에 진표(眞表)가 중창한 것으로 되어 있다.
현 건물은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소실된 것을 1635년 수문(守文)이 재건한 뒤, 네 차례에 걸친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장대석 바른층쌓기의 기단 위에 커다란 막돌초석을 놓고, 민흘림두리기둥을 세워 창방(昌枋)을 걸고 평방(平枋)을 놓아, 공포를 주상(柱上)과 주간(柱間)에도 짜올린 다포식건축이다.
공포는 내외이출목(內外二出目)으로 주간에는 공간포(空間包)를 1구씩 두었고, 살미첨차[山彌檐遮]의 끝은 모두 앙서[仰舌]로 되었는데 섬약하며, 연봉(蓮峰)을 새김한 것이 조선 중기에서 말기로 넘어가는 양식을 보여 주고 있다.
내부는 3층 전체가 툭 터진 통층으로, 초층에 네 개의 고주(高柱)를 세우고, 이 고주와 변주(邊柱) 사이에 퇴량(退樑: 툇간에 건 보)을 걸었다. 이 퇴량 위에 2층의 변주들을 세워 이 변주들과 초층에 세웠던 고주들 사이에 커다란 퇴량을 걸었다. 3층에서는 1층부터 올라간 고주들이 그 변주가 되었다.
이와 같은 가구법(架構法)은 목조탑파에서 하나의 심주(心柱)를 세워 보[樑]들을 심주에 걸던 수법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서, 이 법당은 목조탑파의 가구법이 아니라 3층전각의 가구법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내부의 공포에 있어 초제공(初諸工)과 이제공(二諸工) 모두의 살미첨차 끝은 한 판(板)으로 붙은 운형(雲形)으로 조각되어, 조선시대 중기 이후의 양식을 보여 주고 있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추녀에는 모두 활주를 세워서 떠받치고 있다. 중앙의 본존은 도금한 소상(塑像)으로서 높이 39척 (11.82m)의 입상이며, 좌우의 보처불(補處佛: 主佛의 좌우에 모신 보살)은 높이가 각각 29척(8.79m)으로 역시 동일한 입상으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