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은사지 서 삼층석탑 사리장엄구는 경주시 감은사지 서 삼층석탑에서 발견된 부처의 사리를 봉안한 통일신라 시대의 물품이다. 사리구의 제작 연대는 감은사가 창건된 682년(신문왕 2)과 비슷한 시기로 추정된다. 사리구는 사리병, 사리기, 사리 외함 삼중구조로 있다. 사리를 담은 수정제 사리병에서는 사리 1과가 발견되었다. 사리병을 모시는 몸체인 사리기와 사리 외함은 모두 금동제이다. 사리구의 이러한 삼중구조는 통일신라 시대에 자주 볼 수 있는 형식이다. 이 사리구는 통일신라 왕실 미술과 불교 공예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1959년 12월 감은사지의 서 삼층석탑을 해체, 수리하던 중 3층 사리공(舍利孔)에서 방형의 사리함과 사리기, 사리병 등이 발견되었다.
감은사는 신문왕이 부왕인 문무왕의 뜻을 기리고 감사하기 위해, 능이 있는 대왕암 가까운 자리에 세운 원찰이다. 현재는 절터만 남아 있고 동서방향으로 삼층석탑 2기가 전하며, 양쪽 모두에서 사리구가 발견되었다.
1959년 먼저 해체, 수리가 시행된 서탑의 3층 지붕돌 윗면의 장방형 사리공에서 유물이 발견된 이후, 1996년에는 동탑에서 유사한 형식의 사리장엄구가 확인되었다. 『삼국유사』에는 감은사가 682년(신문왕 2)에 창건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사리구의 제작 연대도 비슷한 시기로 추정할 수 있다.
감은사지 서 삼층탑에서 출토된 사리구는 상당 부분 부식된 상태였으며, 복원 과정을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사리구는 수정제 사리병과 금동제 사리기, 금동제 사리 외함으로 구성되었는데, 이러한 3중 구조는 통일신라 사리구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형식이다.
사리를 담은 수정제 사리병은 목이 길고 입이 약간 벌어졌으며, 바닥의 굽은 따로 만들어 붙였다. 뚜껑은 금실로 장식하였고 병 안에서 사리 1과가 발견되었다. 금동제 사리기는 정사각형의 기단과 사리병을 모신 몸체, 그리고 수정으로 만들어진 보주로 구성되었고 목조 건축물처럼 보인다. 몸체에는 안상형(眼象形)의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 존상을 배치하였다. 각 면에 2기씩 사방으로 자리하고 있어, 팔부중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 위의 난간 네 모서리에는 악기를 연주하는 천인이 있고 중심에는 화염보주가 있다. 사리기에 부착된 존상은 모두 크기가 작지만 얼굴의 표정이 살아있고 세부도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금동제 사리 외함은 방형이며, 네 면에는 사천왕상이 부착되어 있다. 각각 존명과 방위를 상징하는 지물을 들고 있으며, 짐승을 밟고 있는 생령좌(生靈座)의 모습도 나타난다. 사천왕상의 생동감 있는 표정과 역동적인 자세, 섬세한 세부 묘사 등은 통일신라의 뛰어난 조각 수준을 반영하고 있다. 또한 사천왕상의 이국적인 얼굴 모습과 도상의 특징은 중국 당대(唐代)의 조각상과 비교할 수 있어, 양국의 교류 관계를 추정하게 한다.
사리장엄구는 부처의 사리를 봉안하는 물품이므로, 지극한 신앙심을 갖고 최상의 재료와 기법을 선택하여 만드는 공예품이다. 특히 감은사지 서 삼층탑 출토품은 왕실의 후원에 힘입어, 당시 최고의 장인이 참여하여 제작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 현존 유물도 금이나 수정과 같은 고가의 재료를 사용하여, 우수한 세공기술로 완성되었다.
따라서 통일신라 왕실미술과 불교공예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관련된 문헌 자료를 토대로 제작시기를 파악할 수 있으며, 사리구에 등장하는 존상의 이국적인 외모와 여러 특징에서 국제 교류의 단면을 살펴볼 수 있는 점도 의미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