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1963년 7월 경상남도 의령에서 출토된 이 불상은 작은 금동불상 가운데서 꽤 당당하고 큼직한 불상이다. 이 점은 두터운 옷 속에 싸여 신체의 굴곡이 거의 드러나지 않지만 전체적인 체구와 약간 보이는 어깨의 골격 등에서 강인한 힘을 느끼게 하는 점이라든지 옆으로 힘차게 뻗친 새깃 같은 옷자락과 세찬 파도처럼 물결친 옷주름의 강렬성에도 잘 나타나고 있다.
손·발·얼굴 등이 신체에 비해서 유난히 크다. 시무외(施無畏)·여원인(與願印)을 동시에 짓고 있는 큼직한 손, 여기에 왼손의 새끼손가락과 무명지를 구부린 힘차고 절도 있는 손짓을 취하고 있는 것도 이와 잘 조화되고 있는 점이다. 신체에서 묘사된 이러한 격렬함은 좁고 날카로운 대좌(臺座)의 연꽃무늬에서도 그리고 광배의 거칠게 소용돌이치는 불꽃무늬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이런 거칠고 격렬한 조각 수법은 중국 북방 양식과 직결되겠지만 고구려 역시 중국 북방민족, 특히 북위(北魏)를 세운 선비족(鮮卑族)과는 상당한 친연성이 있기 때문에 동일한 문화권에서 나타난 현상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따라서 아마도 앞 시대의 인도적(印度的)인 양식이 크게 후퇴되고 새로운 북방적 특징이 대두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점은 불의(佛衣)에서도 나타난다. 인도 간다라식 불의는 사라지고 가슴이 U자로 벌어졌으며 여기에 비스듬히 승각기(僧脚岐)가 표현되고 띠와 띠 매듭이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이 연가명불상은 북위 불상과는 달리 띠 매듭인, 이른바 신(紳)을 길게 내리지 않고 있는데 아마도 고구려적인 특징이 아닌가 한다.
이런 특징은 발목 위의 하의(下衣)와 대의(大衣) 자락이 장식적이 아니라 단순, 명쾌한 점에서도 보이며 특히 얼굴의 묘사에서는 보다 명료하게 나타난다. 이 얼굴은 기본적으로 중국 용문(龍門) 석굴의 불상 양식과 어느 정도 비교된다. 하지만 그처럼 귀족적 분위기는 없고 팽팽한 얼굴 근육은 긴장감이 넘치며 뚜렷한 코에 악센트를 주면서 눈과 입 주위로 고졸(古拙)한 미소를 표현하고 있다.
이렇게 심오한 정신성을 강렬하게 발산하면서 섣불리 근접할 수 없는 위엄 있는 미소를 얼굴 가득 표현한 것은 뚝섬 출토 금동불좌상과 비슷하게 청순하고 발랄한 당대의 불교적 내면세계를 잘 대변해주고 있는 걸작품이라 하겠다.
광배 뒤의 명문에 보이다시피 이 불상은 평양 동사(東寺)의 승려들이 천불(千佛)을 조성하여 세상에 유포시키고자 만든 것으로, 연가(延嘉) 7년의 명(銘)을 가지고 있다. 명문(銘文)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延嘉七年歲在己未高麗國樂良 東寺主敬弟子僧演師徒卌人共 造賢千劫佛流布第廾九回現歲 佛比丘擣穎所供養(연가7년 기미년에 고려국 낙랑 동사의 주지 경(敬)과 그 제자승 연(演)을 비롯한 사도(師徒) 40명이 함께 현겁의 천불을 만들어 세상에 유포하기로 하였으니 그 제29번째의 불상은 비구 도영(擣穎)이 공양하는 바이다)”.
천불 가운데 29번째인 이 불상이 당시 신라 혹은 가야 지방이던 경상남도 의령에서 출토되었다는 점은 동시에 만들어진 다른 불상들이 주위 여러 나라에 흩어진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의 국력과 불력(佛力)의 유포 그리고 통일의 의지를 주위 모든 나라에 천명한 의의가 있는 불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강인하고 격렬한 불상 양식은 고구려적인 새로운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대표적인 불상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