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불신 높이 93.5㎝, 머리 높이 32㎝. 대좌와 광배를 갖춘 완전한 불상으로서 통일신라 말기에 제작된 작품으로 추정된다.
원래 광배는 같은 전각 내에 봉안된 고려시대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1965년 지정)과 이 석조불좌상 중 어느 것에 부착되었던 것인지를 판별할 수 없어 중간에 걸쳐 놓고 있었다. 그러나 그 조각 수법이나 실측치 등을 볼 때 이 여래상의 광배로 확증되어 현재 여래상에 부착시켜 놓았다.
정수리에는 높고 큼직한 육계가 솟아 있고 머리카락은 소라모양의 나발(螺髮)이다. 얼굴은 온화한 편으로 둥글면서도 갸름한 모습이다. 활꼴의 눈썹 사이로 큼직한 백호공(白毫孔)이 있으며 목에는 삼도(三道)가 뚜렷하다. 가늘고 긴 눈, 평평한 코, 작은 입 등은 비교적 정제되고 원만한 모습을 보여 준다. 턱 밑에는 둥근 홈이 패어 얼굴이 한결 풍만한 느낌이 든다.
통견(通肩) 대의로 감싼 신체는 8세기의 이상적 사실주의(寫實主義)에서 벗어나 9세기의 위축되고 긴장감이 빠진 듯한 불상의 신체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무릎이 넓어 비교적 안정된 모습을 보여 준다.
옷주름은 각선(刻線)이 뚜렷한 평행 옷주름 선으로, 사실적이며 유려하다. 양어깨에 걸쳐 흘러내린 대의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결한 두 손을 덮고 무릎 옆으로 평행한 주름을 이루었다. 하의의 옷주름도 역시 결가부좌한 무릎 위로 평행한 주름 선을 이루며 부드럽게 감싸고 있다.
무릎 아래로는 주름치마와 같은 옷자락이 늘어져 있다. 이것은통일신라 말기에 제작된 여러 불상들, 즉 영주 북지리 석조여래좌상(보물, 1963년 지정), 의성 고운사 석조여래좌상(보물, 1963년 지정), 합천 청량사 석조여래좌상(보물, 1963년 지정), 경북대학교박물관 소장의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1963년 지정), 구미 해평리 석조여래좌상(보물, 1968년 지정) 및 홍천 물걸리 석조여래좌상(보물, 1971년 지정) 등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 불상의 옷주름이 가장 사실적이며 정제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광배는 통일신라시대에 들어 유행한 전형적인 배 모양 광배(光背)로서 장식 문양이 다채롭다. 2줄의 선으로 두광과 신광을 표현하였다. 두광의 가운데에는 홑잎의 8엽연화문을 두르고, 주위를 보상화문(寶相華文)으로 장식하였다. 신광에도 보상화문을 두르고 있다. 광배 둘레에는 화려한 불꽃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이런 형식의 광배는 9세기경에 제작된 의성 고운사 석조여래좌상의 광배와 가장 유사하다.
대좌는 8각연화좌인데 하대는 8각 측면에 안상(眼象)을 새겼다. 그 위에 8판의 복련(覆蓮: 아래로 향하고 있는 연꽃잎)이 새겨진 대석(臺石)이 놓여 있고 중대에는 각 여래상과 보살상이 양각되어 있다. 상대석은 아래에 2단의 각형(角形) 받침이 있고 중엽단판(重葉單瓣)의 앙련(仰蓮 : 위로 향하고 있는 연꽃잎)이 조각되어 있다.
이 여래좌상의 대좌 형식은 통일신라 말기에 유행한 대좌 형식 가운데 하나로서, 구미 해평리 석조여래좌상의 대좌를 비롯하여 홍천 물걸리 석조여래좌상의 대좌, 경북대학교박물관 소장의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의 대좌 등 9세기 대좌와도 공통되는 것이다.
당당하면서도 움츠러든 것 같은 조각 수법, 긴장감이 줄어든 부드러운 신체의 표현, 대좌와 광배의 형식 등에서 볼 때 8세기경의 이상적 사실주의 형식에서 출발하여 고려시대의 조각으로 넘어가기 전인 9세기경에 제작된 작품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