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1749년(영조 25)에 의겸(義兼) 외 12명의 비구(比丘)가 공동 제작했다. 석가불 · 문수보살 · 보현보살의 석가삼존불입상을 중심으로 상단에 관음보살 · 대세지보살, 다보여래 · 아미타여래가 짝을 이룬 석가칠존(釋迦七尊) 형식이다. 본존불의 두광(頭光: 부처나 보살의 정수리에서 나오는 빛) 좌우에 등장한 화불(化佛)인 지권인(智拳印: 왼손 집게손가락을 뻗치어 세우고 오른손으로 그 첫째 마디를 쥔 손 모양)의 비로자나불과 설법인의 노사나불로 미루어 본존불은 비로자나삼신불의 화신(化身)인 석가불이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우견 편단(右肩偏袒)의 법의(法衣: 중이 입는 가사나 장삼 따위의 옷)를 걸친 석가불은 오른손은 내리고 왼손은 가슴 앞으로 들어 엄지와 무명지를 맞댈 듯한 손 모양을 하고 있다. 중앙 계주(中央髻珠)와 정상 계주(頂上髻珠)를 갖춘 나발(螺髮: 부처의 머리카락. 소라 껍데기처럼 틀어 말린 모양)의 머리 모양에, 장방형의 얼굴 가운데로 몰린 눈과 쳐진 눈썹, 큰 코, 작은 입의 표정이 근엄하다.
투명한 흑사(黑絲)와 같은 두광(頭光: 부처나 보살의 정수리에서 나오는 빛)을 지닌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은 각기 여의(如意)와 연꽃을 들고 있다. 보관(寶冠)에 화불(化佛)을 모신 관음보살은 버들가지가 꽂힌 정병(淨甁)을 두 손으로 받쳐들었다. 그리고 보관에 정병이 묘사되어 있는 대세지보살과 다보여래 · 아미타여래가 합장한 자세이다. 키 모양의 광배를 지닌 석가불은 머리가 큰 편이지만 보살상은 균형 잡힌 늘씬한 신체이며 각진 어깨 등에서 경직된 면이 엿보인다.
적색과 녹색 계열을 완화시키는 중간색 층이 다양하지 않은 보색 대비의 강렬한 색상과 금니(金泥) 대신 황색 필선(筆線)을 사용한 문양이 화려하다. 불상의 가슴에 큼직한 만(卍)자를 위시하여 수많은 범자(梵字)가 불 · 보살의 신체에 새겨져 있다. 그리고 태극 문양과 칠보 문양 등의 영락(瓔珞: 구슬을 꿰어 만든 장신구)은 장식적이다.
이 괘불탱의 존상의 명칭은 천신이 제작한 내소사 영산회괘불탱(1700년)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당시 이 일대에서 명성을 날리던 의겸은 내소사 영산회괘불탱의 기본 구성을 따르면서 불 · 보살의 크기와 배치를 약간 변화시켰다. 즉, 석가불을 중심으로 문수보살, 보현보살이 이루는 삼존을 화면 전면에 강조하여 나타낸 후 석가불의 두광 주위에 남겨진 여백에 상반신의 다보불과 아미타불,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대칭을 이루도록 배치하였다. 이와 거의 동일한 도상은 역시 의겸이 제작한 경상남도 청곡사 영산회괘불탱(1722년), 운흥사 괘불탱(1730년) 등에서 엿볼 수 있다. 단지 이 개암사 영산회괘불탱에는 석가불의 두광에 화현불 형태의 비로자나불과 노사나불이 첨가되었기 때문에 주존불은 화신 석가모니불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을 뿐이다.
한지(漢紙)에 묵선만으로 그린 초본은 형태를 표시하기 위한 규칙적인 필선을 사용하기 때문에 일반 회화인 선묘화(線描畵)에서의 회화사적인 필선과는 거리가 멀다. 거대한 화폭임에도 불구하고 어깨 · 발뒤꿈치에 2, 3번씩 덧그렸을 뿐 얼굴과 손은 힘이 깃든 능숙한 필선으로 한 번에 그었다. 석가불의 두광 좌우의 네모꼴 공간은 화불이 배치되는 자리이다.
지금까지 괘불탱과 그 초본이 1조로 발견된 유일한 예로서 자료적인 가치가 크다. 또한 17세기 군도식 영산회상도에서 석가칠존형식으로 권속이 간략화된 개암사 영산회괘불탱은 당시 지리산을 중심으로 전라도와 경상남도 일대에서 활약한 저명한 불화 작가인 의겸의 5점의 괘불탱 가운데 하나이며, 말년의 작품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