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1962년 국보로 지정된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더불어 그 크기와 조각 수법에 있어서 삼국시대 금동 불상을 대표하는 걸작품이다. 출토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1920년대 이후에 발견되어 오랫동안 덕수궁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었다. 머리에는 삼면이 각각 둥근 산 모양을 이루는 관을 쓰고 있어 ‘삼산관반가사유상(三山冠半跏思惟像)’으로도 불린다.
삼국시대에는 많은 반가사유보살상이 제작되었다. 그 중에서도 평안남도 평양시 평천리 출토의 고구려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국보, 1964년 지정)이나 충청남도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국보, 1962년 지정)의 왼쪽 협시인 백제의 반가사유상, 그리고 경주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 중 가장 높은 위치에 조각된 신라의 반가사유상은 삼국의 각 지역에서 비교적 초기 작품에 속하는 예들이다.
특히 이 상은 그 보관 형태나 군의(裙衣)의 주름 처리 방식 등에서 평천리 출토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나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의 반가사유상과 양식적 계보를 같이하고 있다. 그러나 단순하고도 균형 잡힌 신체 표현과 자연스러우면서도 입체적으로 처리된 옷주름, 분명하게 조각된 눈 · 코 · 입의 표현은 정교하게 다듬어진 조각품으로서의 완벽한 주조 기술을 보여 준다. 더욱이 잔잔한 미소에서 느껴지는 보살상의 자비로움은 우수한 종교 조각으로서의 숭고미를 더해 준다.
대체로 삼국시대의 반가사유상은 중국 동위(東魏)부터 북제(北齊)에 유행된 반가사유상의 형식과 양식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이 상은 북제의 상들보다도 더욱 단순하고 자연스럽게 다듬어져 있어 조각적으로 발달된 단계의 표현을 보여 준다.
이 상의 제작 국가에 대하여는 백제와 신라라는 두 가지 의견이 있다. 그러나 1966년에 경상북도 봉화에서 발견된 석조여래좌상의 하반신 부분(경북대학교 박물관 소장)이 알려진 이후, 두 상의 형태나 옷주름 처리 등에서 유사성이 지적되었다. 또한 일본 교토[京都] 고류사[廣隆寺]에 있는 목조반가사유상은 이 상과 모습이 매우 비슷하여 오랫동안 학자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어왔다. 고류사의 창시자인 진하승(秦何勝)이 신라와 문화적인 교류가 있었다든가 혹은 신라에서 전해진 상이 이 절에 모셔졌다든가 하는 일본의 기록은 이 상이 백제보다는 신라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을 높여 준다. 제작 연대는 대체로 7세기 전반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고류사 불상은 불상의 모습뿐만 아니라 19세기 말 보수되기 이전의 얼굴 표현이 경주 황룡사지에서 출토된 금동보살두에서 보이는 한국적인 얼굴 인상과 매우 가까운 점을 발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