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론은 회화의 창작·감상 그리고 회화 양식의 변천 및 발달을 부분적으로 뒷받침하는 여러 가지 이론이다. 회화 창작 활동이 목적의식을 가지고 행해지면서 그림의 존재 가치를 도덕적·철학적·문학적 측면에서 설명하고자 하여 화론이 탄생하였다. 동양화론은 중국에서 남제 사혁이 기운생동 등 육법을 주창한 이래 발전을 거듭하였다. 북송대 소식과 미불 등 사대부 문인들이 문인화론을 체계화하였고, 다시 명대에 동기창·심주 등에 의해 남북종론이 전개되었다. 조선에서는 후기에 진경산수와 풍속화가 발전하고 사실주의 화풍이 성행하면서 자체의 화론이 전개되었다.
인간의 회화 창작 활동은 아무런 이론적인 근거 없이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므로 초기에는 화론이 없이도 창작이 가능하였다. 그러나 차츰 인류의 회화 창작 활동이 뚜렷한 목적 의식을 가지고 행하여짐에 따라 그림의 존재 가치를 도덕적 · 철학적 · 문학적 측면에서 설명하려는 시도가 생기게 되었다. 이러한 이론들을 협의의 화론이라고 할 수 있다.
화론의 범위를 좀더 넓게 보면, 그림의 평가 기준을 설정하는 품평론(品評論) 그리고 그림을 그리는 데 구체적으로 지침이 될 수 있는 화법(畫法)이나 화결(畫訣) 등이 모두 포함된다고 하겠다. 따라서 화론서(畫論書)의 범주에는 이 모든 것을 다룬 문헌들이 포함된다. 또한 그림을 보고 평한 제발(題跋), 이들을 모은 저록(著錄) 그리고 여러 가지 형태의 화가전(畫家傳)까지도 포함된다.
동양 문화권에서는 동양 문화의 특성에 따라 서양과는 아주 다른 화론이 생기게 되었다. 그 가장 중요한 점을 든다면, 동양에서는 처음부터 그림이 대상의 아름다운 모습을 재현하는 데에 그 주된 목적을 두지 않았다는 점이다. 동양 화론을 논할 때 ‘미술’이라는 현대적 어휘가 내포하는 여러 가지 개념과는 전혀 다른 도덕적 · 형이상학적, 또는 문학적 어휘를 주로 사용하게 된다.
동양 회화의 발달에 주도적이었던 중국이 화론의 발달에도 역시 중추적이었다. 즉, 음양오행설, 도가(道家), 유가(儒家) 그리고 북송시대 이후에 사대부들 사이에 크게 유행하였던 선불교(禪佛敎) 등의 사상적 배경에서 회화의 존재 이유, 작화(作畫) 태도, 회화에서 추구하는 가치의 설정 등과 관련되는 여러 가지 이론이 생기게 되었다. 그러므로 먼저 중국 화론의 주요 전개 과정을 살펴보고 우리 나라에서 화론이 어떻게 수용되고 발달되었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중국 회화사상 최초의 화론서라고 할 수 있는 6세기경의 문헌인 남제(南齊)의 사혁(謝赫)이 지은 『고화품록(古畫品錄)』 서문에 회화에서 중요시되어야 하는 여섯 가지 점을 육법(六法)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 평가 기준에 따라 삼국시대부터 그 당시까지 화가들을 여섯 등급(六品)으로 나누어 간단히 평가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협의 및 광의의 화론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육법은 그 이후 동양회화 발달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육법 중의 첫 번째인 기운생동(氣韻生動)은 가장 중요한 평가 기준이지만 그 뜻이 처음부터 분명히 전달되지 않아 논란의 여지를 남겼다.
그러나 사혁이 활약하던 시대에는 인물화가 가장 중요한 화목(畫目)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 구절은 인물화에서 대상의 기(氣), 즉 정신이 보는 사람에게 공감되며 살아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준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즉, 그림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란 대상의 기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느끼게끔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개념은 당나라 때부터 조금씩 변천되기 시작하였다. 9세기 중엽에 활약한 장언원(張彦遠)은 『역대명화기(歷代名畫記)』에서 형사(形似 : 모습을 닮게 그리는 것)가 이루어지지 않아도 기운을 달성할 수 있다는 이론을 내세웠다.
북송의 곽약허(郭若虛)는 『도화견문지(圖畫見聞誌)』(1070년대)에서 기운이란 배워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화가가 날 때부터 알아야 하는 것이며, 높은 인품과 학식을 갖춘 사람은 자연히 기운을 갖추게 되며 기운이 높으면 생동이 저절로 이루어진다는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그러면서 문인화의 우월성을 못박은 셈이 되었다.
명나라 말기의 동기창(董其昌)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의 『화선실수필(畫禪室隨筆)』에서 “기운은 천수(天授)의 기질이며 배울 수 없는 것이지만 만 권의 책을 읽고 만리를 여행하여 마음을 깨끗이 하고 산수화를 그리면 전신(傳神)할 수 있다.”고 하였다.
청나라 초기에 발간되어 지금까지 중국 · 우리 나라 · 일본에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종합적이고 포괄적인 동양화 지침서인 왕개(王槩)의 『개자원화전(芥子園畫傳)』에서는 기운(氣韻)을 기운(氣運)으로 표기하였다. 이로써 그 당시 산수화에서 중요시하던 기세(氣勢)의 영향을 간접적으로 반영시킨 것으로 생각된다.
골법용필(骨法用筆) 역시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골, 즉 뼈대, 또는 그림의 중요한 구조적 요소를 설정하는 데 어떻게 붓을 사용하는가에 관한 문제라고 해석할 수 있다. 즉, 동양화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인 필선에 관한 법이다.
중국에서는 서예에 관한 이론이 화론보다 먼저 나왔고, 회화의 용필법은 서예와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발달하였다. 특히 9세기 중엽의 저술인 『역대명화기』에서 글씨와 그림은 그 원류가 같다(書畫同源論)는 설을 내세워 서예와 회화에서 필선을 긋는 데 용필법을 중요한 요소로 삼게 되었다.
응물상형(應物象形)은 대상의 형체를 묘사하는 것이라고 간단히 풀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상이라는 말이 내포하는 여러 가지 의미, 즉 물체의 단순한 외적 형태, 자연현상, 물의(物宜 : 사물이 당연히 그러하여야 할 상태) 등 깊은 의미를 고려하여야 하므로 물체의 외형을 단순히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문제로만 볼 수 없다.
수류부채(隨類賦彩)는 사물의 종류에 따라서 채색을 가하는 것으로 간단히 설명될 수도 있다. 그러나 역시 수류(隨類)라는 개념에 대하여 좀더 깊은 뜻을 고려하여야 할 것이다.
경영위치(經營位置)는 그림의 구도를 말한다.
전이모사(傳移模寫)는 모사에 의해서 대가의 좋은 그림을 후대에 전달하는 것을 말한다. 이 법은 동양 회화의 특수성 중의 하나인 복고주의(復古主義)와 임(臨) · 방(倣) · 의(擬) · 필의(筆意) 등 옛사람의 그림을 그 정신 및 형태를 그대로 따라서 그린다는 전통을 낳게 한 데 직접적으로 기여하였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육법은 사혁이 갑자기 만들어 낸 것이 아닐 것이며 그 당시까지 발달해 온 회화 및 이론을 그가 체계화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 한 예로 동진(東晉)의 고개지(顧愷之)가 쓴 「논화(論畫)」라는 글에 이미 ‘전신사조(傳神寫照)’ 즉, 대상을 닮게 그림으로써 그 정신을 전달한다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 기운의 개념과 상통한다.
한편, 당나라 말 오대(五代) 초기의 산수화가인 형호(荊浩)의 저술인 『필법기(筆法記)』에는 육요(六要)가 등장한다. 이들은 ① 기(氣), ② 운(韻), ③ 사(思), ④ 경(景), ⑤ 필(筆), ⑥ 묵(墨)을 말한다.
육법과 비교하여 보면, 기와 운이 각각 독립된 요소가 되었으며 여기서 운은 ‘형체를 만드는 데 있어 필적을 숨기고 예절을 갖추어 속되지 않게 하는 것’이라는 정의를 내리고 있어 사혁의 기운과는 좀 다른 의미로 쓰였다.
또한 한 가지 중요한 차이점은 색채에 관한 조항이 없는 대신에 먹에 관한 것이 새로 들어 있다는 점이다. 이는 6세기 초와 10세기 중엽 사이에 일어난 중국 회화 기법상의 근본적인 변화, 즉 당나라 말 오대 초기부터 수묵화가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하였음을 보여 주는 문헌적 증거로 볼 수 있다.
당나라 때에 이르러 여러 가지 화론서들이 저술되었고 이들은 각각 회화의 품등을 구분하는 독자적인 등급을 설정하였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장언원의 『역대명화기』이다. 그는 화가를 상중하(上中下)와 또 그 각각의 상중하로 모두 아홉 등급(三品九等級)의 형식을 취하였다.
그러나 그중 자연(自然, 上品上) · 신(神, 上品中) · 묘(妙, 上品下) · 정(精, 中品上) · 근세(謹細, 中品中)의 다섯 등급까지만 구체적으로 정의하고 이들이 육법을 모두 포함한다고 하였다.
그가 ‘자연’을 최상의 등급으로 정하는 도가적(道家的)인 입장을 취한 것은 이 책의 시작에 회화의 도덕적 공리성을 유가적 입장에서 표명한 “그림이라는 것은 교화(敎化)가 되고 인륜(人倫)을 도우며 신비스러운 변화를 꿰뚫고 심오하고 미세한 것까지 헤아려, 그 공은 육적(六籍)과 같으며 사시(四時)와 더불어 운행한다.”고 한 것과 좋은 대조를 보인다.
이것은 그의 화론이 유가 · 도가 등 여러 사상의 혼합된 배경에서 생겨났다는 것을 보여 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장언원과 거의 동시대 사람인 주경현(朱景玄)은 『당조명화록(唐朝名畫錄)』에서 이와 좀 다른 신(神) · 묘(妙) · 능(能) · 일(逸)의 네 등급을 설정하였다.
여기서는 일이라는 품격은 네 등급의 마지막인데, 당시까지 상법(常法)으로 여겨지던 그림의 기법에서 벗어나 필선의 중요성을 무시하고 먹을 튀기는 발묵법(潑墨法)으로 그리는 것을 말한다. 왕묵(王墨)과 같은 사람들을 이 화격에서 취급하였다.
그러나 북송의 황휴복(黃休復)이 쓴 『익주명화록(益州名畫錄)』(1006년)에는 일격(逸格)을 신격(神格) 위에 놓았다. 여기에 오대의 화가 손위(孫位) 한 사람을 포함시켰다. “손위는 성정(性情)이 소탈하여 마음속에 품은 바가 초연하며……성품이 고매하고 인격이 뛰어나다.”고 하여 이미 북송 문인화 이론의 영향을 짙게 보이고 있다.
9세기 중엽과 11세기 사이에 일어난 변화로는 상법에 얽매이지 않는 초탈한 태도를 높이 평가하는 풍조를 들 수 있다. 이와 같은 변화는 『장자(莊子)』에 나오는 전국시대 송나라 원군(元君)이 화사를 선택할 때 어느 화가가 옷을 벗고 땅에 철썩 앉아(解衣盤礴) 평상적인 예의범절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보고, 그 사람이 진정한 화사라고 한 이야기를 즐겨 인용한 송 · 원대의 문인화가들의 태도에서 드러난다.
또한 원나라 때 화가 예찬(倪瓚)은 자신의 대나무 그림이 자기의 가슴속에 있는 자유분방한 기분(胸中逸氣)을 표현한 것뿐이라고 한 말 등이 세속적인 틀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는 문인화가들의 의지를 잘 표현해 준다고 하겠다.
이 밖에도 청나라 때 황월(黃鉞)의 『이십사화품(二十四畫品)』(약 1800년경)에서 기운 · 신묘 · 고고(高古) · 창윤(蒼潤) · 침웅(沈雄) · 충화(冲和) · 담일(澹逸) · 박졸(樸拙) · 초탈(超脫) 등의 기준으로 좀더 세세한 품등을 설정한 것도 있다. 그러나 기본적인 것은 위에 언급한 몇 가지이다.
문인화 이론이 체계화된 것은 북송시대부터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도 중국 회화사에 잘 알려진 화가들 중 동진의 고개지, 당나라의 염립본(閻立本) 및 왕유(王維) · 노홍(盧鴻) 등 무수한 화가들은 철학자 · 정치인 · 시인 등 화가 이외의 자격으로 역사에 남았다.
그러므로 문인 사대부가 여기(餘技)로 그림을 그린다는 사실은 중국 역사상 이미 오랜 전통으로 존재해 왔다. 그러나 북송 때 소식(蘇軾) · 문동(文同)· 이공린(李公麟)· 미불(米芾) · 황정견(黃庭堅) 등과 같은 그림 혹은 글씨 또는 시서화에 능하였던 일군의 사대부들이 자신들이나 동료 사대부 화가들의 그림에 관한 많은 이론을 글로 표현하게 된다.
이 때에 비로소 지금 우리가 문인화론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론적 체계가 형성되었다. 이와 같은 글들은 미불의 경우 『화사(畫史)』 · 『서사(書史)』 등의 체계를 갖춘 저술의 형태로 남아 있다.
그리고 소식의 경우 기(記)라는 형식의 비교적 짧은 글이나 발문 · 시 등의 형식으로 되어 있어 주로 『소동파전집(蘇東坡全集)』에 수록되어 있다. 그 밖에도 곽약허의 『도화견문지』, 휘종(徽宗)의 명에 의하여 1120년에 편찬된 『선화화보(宣和畫譜)』 등에도 당시의 문인들이 가졌던 그림에 관한 여러 가지 견해가 직접 · 간접적으로 표출되었다.
소식의 대표적인 글로는 그림에서 ‘상리(常理)’의 표현의 중요성을 강조한 「정인원화기(淨因院畫記)」, 문동의 대나무 그리는 방법, 기법의 연마, 창작 과정, 감상자와 화가와의 관계 등 여러 가지 이론이 집약적으로 표현된 「문여가화운당곡언죽기(文與可畫篔簹谷偃竹記)」가 있다. 또한 그림을 논할 때 대상과 닮고(形似) 안 닮고를 논하는 사람은 어린애와 같으며, 시와 그림은 본래 한가지 법칙에 의한 것(詩畫本一律)이라는 유명한 시 등을 들 수 있다.
그가 문동의 묵죽화에 관하여 지은 여러 개의 시들은 문동의 묵죽화를 조물(造物)의 창조에 비할 만큼 높은 경지에 올려놓았다. 북송시대 사대부 화가들에 의하여 체계화된 문인화 이론은 대략 다음과 같다.
① 문인화는 문인(또는 士人)들의 그림이며 이들이 평소에 쌓은 지식 · 교양 · 필력(筆力)을 토대로 흥이 일었을 때 이를 그림에 기탁하는 것이다.
② 형사(形似)보다는 사의(寫意), 즉 뜻의 표현을 중요시한다.
③ 마음 속에 완전한 상(象)을 갖추고(胸中成竹) 조금도 지체 없이 그린다.
④ 이때 기법의 구애를 조금도 받지 않는다(心手相應). 『장자』에 나오는 포정(庖丁)이나 윤편(輪扁)과 같이 도의 경지에 이른 기법을 말한다.
⑤ 서예의 필획이 쓴 사람의 성격, 인품을 나타내는 것과 같이 그림도 그린 사람의 모든 것을 대표한다.
⑥ 그림은 서로를 이해하는 참다운 지기(知己)에게 주는 것이지 물질적 대가를 받고 그려 주는 것이 아니다.
⑦ 문인화에서 추구하는 가치는 기운 · 자연 · 천진(天眞) · 평담(平談) 등이다.
원나라 때 문인들은 한층 더 나아가서 그림에서 고의(古意)를 중요시하여 복고주의 화풍을 일게 하였다. 그리고 회화를 자기 표현의 수단으로 한 단계 더 발전시켰다. 따라서 사의라는 개념이 글자 그대로 그림에 적용되고 그림에서 필획 자체의 서예성이 더욱 강조되었다. 조맹부(趙孟頫) · 오진(吳鎭) · 예찬 · 탕후(湯垕) 등 여러 사람들이 이에 크게 기여하였다.
위와 같은 이론을 따르면, 자연히 문인화는 직업 화가들이 그린 그림과 본질적인 차이를 보이게 된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이러한 논리적 전개 과정을 거쳐 명나라 말에는 유명한 동기창의 남북종화론(南北宗畫論)이 나오게 되었다.
남북종화(南北宗畫)라는 말이 처음으로 쓰이게 된 것은 1610년 경에 발표된 「화설(畫說)」이라는 글에서부터이다. 이 글은 막시룡(莫是龍)의 이름으로 발표되었으나 지금은 동기창의 글이라는 설이 압도적이다.
이 글에서 당나라 때의 선불교가 남종 · 북종의 두 파로 나뉜 것처럼 그림도 이 때부터 남종 · 북종의 두 갈래로 갈라졌으나 각 파에 속하는 화가들의 출신지가 남쪽이냐 북쪽이냐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즉, 인간의 내적 진리를 추구하고 자유분방한 태도로 자기 표현을 중시한 문인화가들의 태도를 돈오(頓悟)를 주장한 남종 선불교에 비유하였다.
그리고 형사를 중요시하고 기법의 연마를 그 자체로서 중요시한 직업 화가들을 점수(漸修)를 주장한 북종 선불교에 비유하여 중국의 역대 화가들을 두 무리로 구분하였다. 남종화의 선두에는 당나라의 사대부이며 시인인 동시에 수묵 산수화의 시조라고 생각된 왕유를 세워 놓았다.
그리고 당나라 말과 오대의 수묵 산수화가인 장조(張璪) · 형호 · 관동(關仝) · 곽충서(郭忠恕) · 동원(董源) · 거연(巨然), 북송과 남송의 산수화가인 이성(李成) · 범관(范寬) · 미불 · 미우인(米友仁), 원나라 때의 고극공(高克恭), 원사대가인 황공망(黃公望) · 오진 · 예찬 · 왕몽(王蒙) 등을 열거하였다.
북종화에는 당나라 때의 청록 산수화가로 알려진 이사훈(李思訓) · 이소도(李昭道), 오대의 궁정 화가 조간(趙幹), 송나라 때의 청록 산수화가 조백구(趙伯驅) · 조백숙(趙伯驌), 그리고 남송 화원 화가인 마원(馬遠)과 하규(夏珪)를 열거하여 놓았다.
동기창의 남종화가 · 북종화가 명단은 여기서 끝났다. 그러나 그 뒤에 명나라 때의 심주(沈周) · 문징명(文徵明) 등 오파(吳派) 화가들이 당연히 남종화에 들어갔고, 마하파(馬夏派)를 계승한 절파(浙派) 화가들이 북종화에 포함되었다.
이 분류에서는 이미 여러 차례 언급되었던 문인화의 가치관이 가장 크게 작용하여 화가의 인품이나 사회적 신분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분류 기준으로 작용하였다. 그리고 여기에 어느 정도 그림의 양식적 특징이나 구분이 수반되었다. 여기서 자연히 우리가 흔히 쓰는 남종 문인화라는 말도 생겨나게 된 것이다.
남종화 · 북종화의 가름과 남종화를 우위에 두는 이른바 상남폄북론(尙南貶北論)은 중국 회화사를 객관적으로 볼 때 상당히 편견에 치우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명나라 말 청나라 초의 지성사적 지표(指標)로서 중요하며, 동기창 이후 모든 미술사가들이 그 영향을 받았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한국 회화사에서는 조선 후기에 와서야 본격적인 화론서라고 할만한 저술이 나온다. 고려시대나 조선 전기에는 문인들의 문집에 산재해 있는 산수화 · 묵죽화 · 초상화 등에 쓰여진 화제 · 발문 · 화찬(畫贊) 형식의 글들을 통해서 단편적으로 당시의 사대부 화가들이 그림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생각이나 중국 회화사, 또는 화론에 대한 이들의 지식을 알아볼 수 있다.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시대의 자료는 더욱 영세하여 이 분야에 대한 이해가 거의 불가능한 실정이다.
고려시대의 사대부들이 중국과의 문화 교류를 통하여 중국의 화론서를 접하게 되었다. 중국 문인화 이론의 전개에 관한 정보를 얻게 되는 것이 아마도 고려시대의 화론 전개의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곽약허의 『도화견문지』 고려국조(高麗國條)에는 고려와 북송과의 회화 교류에 관한 구체적인 사항들이 기록되어 있다. 장언원의 『역대명화기』가 송나라의 『태평어람(太平御覽)』(997년)에 수록된 상태로 12세기 중에(1100년 · 1192년) 들어왔다. 송나라 때 문인화가들의 그림도 12세기 후반기 내지 13세기 초에는 사대부 화가들에게 잘 알려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시대 사대부들의 문집 중 회화에 관계되는 글들이 수록된 대표적인 것들은 이규보(李奎報)의 『동국이상국집』,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 최자(崔滋)의 『보한집』, 안축(安軸)의 『근재집(謹齋集)』 그리고 이색(李穡)의 『목은집』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들 문집에는 당시의 사대부 묵죽화가들의 그림에 화찬 · 제시(題詩) 등이 있어 소식과 문동의 묵죽화 및 문인화론이 수용되었음을 보여 준다. 또한 이들의 회화 평론에는 형사보다는 전신이 중요시되었다든지 앞서 언급한 문인화의 가치 기준(자연 · 평담 · 천진 등)들이 그대로 적용되었음을 보여 주는 예가 많이 보인다.
고려시대 사대부들의 문인화 정신을 이어받은 조선 초기의 사대부들도 그들의 문집에 무수한 제화시(題畫詩)나 화찬을 남겼다. 이들 중 많은 부분이 오세창(吳世昌)의 『근역서화징(槿域書畫徵)』에 인용되어 조선시대 회화사나 화론의 형성 과정을 살펴보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대표적인 것들로는 서거정(徐居正)의 『사가정집(四佳亭集)』 · 『필원잡기(筆苑雜記)』 · 『동문선』, 강희맹(姜希孟)의 『진양세고(晉陽世稿)』,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 · 김일손(金馹孫)의 『탁영집(濯纓集)』, 김안로(金安老)의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 등을 들 수 있다.
초기의 사대부들이 시 · 서 · 화 삼절(三絶)을 높이 평가한 예를 많이 볼 수 있다. 화가의 높은 경지를 이해하는 감상자와의 관계에 대하여 『탁영집』에 기록된 이종준(李宗準)의 그림에 관한 다음과 같은 구절은 당시 사대부들의 회화관을 잘 보여 준다.
“……서 · 화 · 시문은 모두 한 가지 흉중의 토자(土苴)라 흉중에 들은 것이 없으면 어찌 능히 시서화로 꽃피울 수 있겠느냐……내가 팔 폭 화폭 중에 앉으니 어느새 내 몸이 중균(仲均, 李宗準)의 흉중에 들어갔는지 모르겠다.” 즉, 이 구절에서 화가의 의도를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을 그의 가슴속에 들어간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어, 그림을 보면 화가를 보는 듯하다는 송나라 사대부들의 이론을 한층 더 발전시킨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강희맹은 사대부의 생활 속에서 그림이 여기 이상의 적극적이며 긍정적인 구실을 하였음을 주장하여 크게 주목된다. 즉, 그는 “군자가……책상에 앉아 종이에 붓을 날려 만물을 정관(靜觀)할 때에 마음으로는 터럭만 한 것도 능히 꿰뚫어 볼 수 있으며 손으로 그림을 그릴 때 내 마음도 극치에 도달하는 것이다.
무릇 모든 초목과 화훼는 눈으로 그 진수를 보아 마음으로 얻는 것이요, 마음에 얻은 진수를 손으로 그려 내는 것이니, 한 번 그림이 신통하게 되면 한 번 나의 정신(마음)도 신통하게 되며, 한 번 그림이 정신을 신통하게 되면 한번 마음도 신묘하게 된다.”고 하여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정신으로 사물을 관찰하고 그림으로 표현하면, 역(逆)으로 그림이 정신을 신통하게 하고 마음을 신묘의 경지로 이끌어 준다는 이론을 내세웠다.
그러나 성종의 회사(繪事)에 대한 관심이 지나친 것으로 본 사대부들은 그림을 말기(末技), 또는 말예(末藝)라고 하여 중국과 고려의 군주 중 그림에 탐닉하여 국운의 쇠함을 초래하였던 예를 들어가며 비난한 것으로 보아, 사대부 자신들은 그림 그리는 것을 묵희(墨戱) 정도 이외에는 그리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은 듯하다.
사대부 화가 강희안(姜希顔)이 자신이 후대에 그림으로 명성이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아 작품을 모두 없애 버렸다는 이야기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조선 전기에 비하면 후기에는 중국의 남종 문인화가 좀더 본격적으로 소개되어 많은 문인화가들이 나왔다. 이와 병행하여 이름 그대로 화론서다운 화론서가 집필되기도 하였다. 17세기 말기부터 19세기 중반에 걸쳐 씌어진 문인화가들의 화론이나 화평(畫評)에 관한 저술, 또는 화가전(畫家傳) 중 대표적인 것은 다음과 같다.
윤두서(尹斗緖)의 유고 『기졸(記拙)』 중의 「화평」, 남태응(南泰膺)의 『청죽만록(靑竹漫錄)』 중의 「청죽화사(靑竹畫史)」, 조영석(趙榮祏)의 『관아재고(觀我齋稿)』, 이하곤(李夏坤)의 『두타초(頭陀草)』, 이긍익(李肯翊)의 『연려실기술』 별집, 강세황(姜世晃)의 『표암유고(豹庵遺稿)』, 이인상(李麟祥)의 『능호집(凌壺集)』, 남공철(南公轍)의 『금릉집(金陵集)』 중의 「서화발미(書畵跋尾)」, 서유구(徐有榘)의 『임원경제십육지』 중의 「유예지(遊藝志)」, 신위(申緯)의 『경수당집(警修堂集)』, 김정희(金正喜)의 『완당전집(阮堂全集)』 중의 서화론, 조희룡(趙熙龍)의 『해외난묵(海外蘭墨)』 · 『석우망년록(石友忘年錄)』 그리고 중인(中人)들의 전기인 『호산외사(壺山外史)』 등 다수가 있다.
이들의 내용을 보면 대부분이 우리 나라 화가들에 관한 촌평, 또는 전기로부터 그들이 보았던 중국 서화들에 관한 의견, 중국 화론서에서 발췌한 글들을 모아 놓은 것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하다.
윤두서의 「화평」에는 조선 초기 안견(安堅)으로부터 중기에 이르기까지의 20명의 화가에 대한 평과 소식 · 조맹부 등 중국 화가에 관한 평이 있다. 그는 조선시대 화가들을 대개 안견을 기준으로 하여 평하고 있다.
「화평」보다 좀더 체계적인 화론 · 화사 관계 저술인 「청죽화사」는 화사(畵史), 삼화가유평(三畵家喩評), 화사보록(畵史補錄) 상하로 구성되어 있으며 안견으로부터 18세기 중엽까지의 화가들을 촌평하였다.
그 중 「삼화가유평」에서는 김명국(金明國) · 윤두서 · 이징(李澄) 등 세 화가를 각각 신품 · 묘품 · 법품(法品)으로 품등하여 이들의 장단점을 구체적으로 비교하며 논하고 있어 최초의 현대적 평론이라고 할 만하다.
신품에 속한 김명국은 태어날 때부터 아는 사람(生而知之)으로 그의 그림은 천변(天變)하나 거칠다는 폐단이 있고, 윤두서는 배워서 아는 사람(學而知之)으로 그의 그림은 공교하나 작은 것이 흠이며, 이징은 고생 끝에 알게 되는 사람(困而知之)으로 모든 것을 법도에 맞추기는 하였으나 속된 것이 흠이라고 하였다.
만취(滿醉)해서 그림을 잘 그린 것으로 알려진 호방한 화가 김명국을 가장 높이 평가한 것 그리고 속된 것을 가장 큰 병으로 생각하는 것 등은 송나라 · 원나라 이래의 문인화 이론의 반영이다. 그러나 신랄한 비평을 서슴지 않은 남태응의 과감하고도 주관적인 태도는 그보다 약 1세기 후인 김정희의 비판적 태도를 예시하기도 한다.
17, 18세기의 문인화가들은 그림에서 사의성(寫意性)이나 전신뿐만 아니라 사생을 통한 외형의 사실적이고 정확한 묘사를 중요시하였다. 이와 같은 이론은 윤두서의 「자화상」 · 「말 그림」 그리고 「소과도(蔬果圖)」 등에서 보여 준 관찰에 의한 철저한 사실적 묘사나 조영석의 사생화첩인 「사제첩(麝臍帖)」에서 볼 수 있는 사실주의를 뒷받침해 주어 더욱 의의가 크다.
조선 전기의 사대부들이 그림을 잡기(雜技), 또는 말예(末藝)로 보아 그림 그린다는 사실을 알리기를 꺼려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조영석은 그림의 효용론을 주장하고 군자가 마땅히 유념하여야만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그의 태도는 당시의 문인화가들의 그림에 대한 좀더 적극적인 태도를 반영한 것이다.
조선 후기의 사대부들은 한편 17세기 초기부터 18세기에 걸쳐 우리 나라에 들어오기 시작한 『고씨화보(顧氏畫譜)』 · 『당시화보(唐詩畫譜)』 · 『개자원화전』 등의 중국 화보에서 받아들여야 할 점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윤두서 · 조영석 · 강세황 · 신위 · 조희룡 · 전기(田琦) 등 많은 문인화가들이 이들 중국 화보에 수록된 역대 중국 명화가들의 구도와 필법을 기초로 하면서 조금씩 개성적 표현을 가한 그림들을 다수 남겼다.
후기의 서화론에 크게 영향을 미친 김정희는 중국 및 조선시대의 서화가들을 평한 많은 글에서 자신의 서화관을 피력하였다. 추사체(秋史體)라는 독특한 서체를 개발한 그는 그림도 화법을 따르지 말고 서법에 따를 것을 강조하였다.
특히 난초를 그릴 때는 예서법(隷書法)으로 그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심의(心意)를 존중하고 문자향(文字香) · 서권기(書卷氣)가 은은히 풍기는 청고 고아(淸高古雅)한 선비의 그림을 높이 평가하는 전형적인 중국 문인화관을 견지하였다.
19세기 조선 실학자들의 서화론에 관한 관심은 중국 서화론의 비교적 체계적인 소개를 시도한 서유구의 『유예지』와 같은 저술을 낳게 하였다.
여기서 그는 총론 · 위치 · 명제 · 사법(師法) · 필묵 등 이론과 기법의 전반적인 문제 그리고 인물 · 산수 · 화과(花果) · 영모 · 사군자 등 각 화목에 관한 이론을 『도화견문지』 · 『임천고치(林泉高致)』 · 『산정거화론(山靜居畫論)』 등 무수한 중국 화론서에서 발췌하여 편집해 놓았다.
결국, 조선시대 후기의 화론은 김정희를 중심으로 한 중국 서화 선호 태도보다 17, 18세기의 한국 회화에 관한 관심과 독자적인 한국 회화 비평이 대두된 사실 등에 더 주목을 요한다. 또한 사실주의를 중요시한 태도는 진경산수와 풍속화라는 한국 회화사상 가장 괄목할 만한 화풍을 낳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