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첩은 조선 후기의 화가 조영석이 그린 화첩이다. 화가가 50대에 제작한 작품들을 그의 아들이 모아서 만들었다. 일상적 풍경을 그린 15점이 들어 있는데 풍속화·영모화·초충도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 작품들은 종이의 재질이나 크기가 다양하며 작품의 수준도 일정치 않다. 화첩 표지 왼쪽에 사향노루의 배꼽이라는 뜻의 ‘사제’라는 표제가 있다. 발문은 이병연(1671∼1751)이 썼다. 화첩 수록 그림 중 「새참」과 「목기 깍기」 등의 풍속화가 특히 주목된다. 18세기 전반의 작화 방법 및 풍속화가의 서민 삶에 대한 관심을 엿볼 수 있다.
종이 바탕에 옅은 채색으로 그렸으며 크기는 39×29.6㎝이다. 이 『사제첩(麝臍帖)』은 생활주변의 일상적 풍경을 직접 사생한 15점을 모은 화첩으로 풍속화(風俗畵) · 영모화(翎毛畵) · 초충도(草蟲圖)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 15점의 작품은 종이의 재질이나 크기가 매우 다양할 뿐만 아니라 초고(草稿), 그리다 만 것, 완성작 등이 뒤섞여 있으며 매우 뛰어난 수작(秀作)이 있는가하면 다소 떨어지는 것도 보이는 등 작품의 수준도 일정치 않다.
표지는 왼쪽에 조영석이 사향노루의 배꼽이라는 뜻의 ‘麝臍(사제)’라는 표제를 달고, 오른쪽에 “남에게 보이지 말라 범하는 자는 나의 자손이 아니다(勿示人 犯者非吾子孫)”라는 경고문을 적어 놓았다.
15점의 작품에는 관아재의 관서(款書)나 도장이 전혀 없어 작품편년에 어려움이 많다. 그러나 화첩 첫 장에 쓰인 이병연(李秉淵, 1671∼1751)의 발문(跋文)에 의하면 조영석이 세조어진(世祖御眞) 중모사(重模事)로 파직된 1735년(50세) 이후에 그려서 간직하고 있었던 작품들을 아들들이 모아서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조영석이 또다시 1748년(63세) 숙종어진 중모사를 거부한 일로 큰 곤욕을 당하였는데 이병연이 발문에서 이를 언급하지 않아 편년하한을 63세 이전으로 보았다. 그러나 60대의 노필(老筆)이라고 여겨지지 않기 때문에 이 작품은 50대에 제작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화첩에 수록된 그림 중 주목되는 것은 풍속화들인데, 바느질 · 새참 · 목기 깎기 · 마구간의 작두질 · 여물 끓이는 마동(馬童) · 마구간 · 소 · 젖을 빠는 송아지 · 젖 짜는 어미소와 송아지 등이다. 이 가운데 「새참」과 「목기 깍기」가 주목된다.
「새참」은 농부들이 농사일 중간에 들밥을 먹는 장면이다. 수평으로 길게 늘어서 있지만 이들은 네 무리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왼쪽부터 살펴보면, 갓을 쓰고 독상을 받은 이가 이 농사일을 감독하는 마름일 것이고, 그 위에는 아낙이 있으며, 다음에는 두 일꾼이 마주보며 식사를 하고 있다. 세 번째 무리에는 세 사람이 광주리를 중심으로 모여 있으며, 끝에는 한 일꾼이 어린아이에게 밥을 떠먹이고 있다. 세 번째 무리의 일꾼들이 밥을 더 달라고 요구하니 아낙은 소쿠리를 들고 달려가는 모습으로 연결 지었다.
간단한 그림이지만 무리 지어 담소를 나누고 밥 달라고 소리치며 어린아이를 돌보는 장면 등에서 식사 시간의 웅성거림과 정겨움이 잘 표현되었다. 수평 시점을 적용한 데다 마름마저 갓이나 독상이 없었더라면 구별이 안 될 정도로 파묻혀 있어 그들과의 친밀감 속에서 표현하려는 작가의 노력이 엿보인다. 옷에는 흰색과 옅은 청색을 사용하여 빛깔을 내었는데, 흰색의 연분(鉛粉)이 일부분 썩었다.
이 화첩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은 「목기 깎기」이다. 소재나 기구, 인물의 배치 등에서 윤두서(尹斗緖)의 「선차도(旋車圖)」를 연상케 한 점으로 보아 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면서도 여러 군데서 차이점이 드러나 두 사람의 풍속화 세계를 비교할 수 있는 좋은 자료라 생각된다.
작업장을 나무 아래에 마련한데다 그것으로도 더위가 가시지 않은 듯 웃통을 훌훌 벗어 나무에 걸어 놓고 있다. 그리고 옅은 청색으로 녹엽을 그려 무더위가 극성인 한여름의 계절 감각을 나타내려고 애쓴 흔적을 볼 수 있다. 인물의 형상을 보면, 윤두서의 중국풍이 가시고 조선인이 등장하는데, 웃통을 벗어 드러난 살갗을 옅은 갈색으로 담채하여 햇볕에 그을린 일꾼의 가식 없는 모습을 표현함으로써 서민의 체취를 느낄 수 있다. 간단한 표현의 그림이지만 사실적으로 접근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조영석의 『사제첩』에서는 18세기 전반의 작화(作畵)과정이나 작화방법 등을 엿볼 수 있어 매우 흥미롭다. 특히 풍속화들은 조영석의 서민 삶에 대한 관심을 사실주의적 창작 태도로 구체화시킨 것이다. 이를 토대로 18세기 후반 내지 19세기 초 회화적 기량을 갖춘 김홍도(1745-?), 김득신(1754-1822), 신윤복(1758 -?) 등의 풍속화에서 질적 발전이 가능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