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여흥(驪興). 고려시대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민종유(閔宗儒)의 6대손으로, 할아버지는 참판 민심언(閔審言)이고, 아버지는 민충원(閔沖源)이며, 어머니는 오부(吳溥)의 딸이다.
1456년(세조 2) 생원시에 1등으로 합격했고, 1459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예문관검열로 처음 벼슬길에 올랐으며, 곧 인수부승(仁壽府丞)으로 옮겨졌다. 1459년 6월 인수부승 재직 중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이영은(李永垠)과 함께 인재 양성을 위한 방책으로서 한관(閑官)을 제수하여 학문에만 전념하게 하는 사가독서(賜暇讀書)의 혜택을 받았다.
그 뒤 세조대를 통하여 사관직(史官職)을 겸대, 1464년 천문·풍수·율려(律呂)·의학·음양·사학(史學)·시학(詩學)의 육성을 위하여 각 분야에 6인의 젊은 문신을 배치할 때 최경지(崔敬止) 등과 함께 시학문(詩學門)에 배속되었다.
1469년(예종 1) 봉상시첨정(奉常寺僉正) 재직 중 춘추관이 『세조실록(世祖實錄)』의 편찬을 시작하자 그간에 작성한 사초(史草)를 수납하였다. 이때 작성한 사초에는 실록 편찬을 주관한 대신 등의 득실도 기재되어 있었다. 그런데 사초에 이를 기록한 사관의 이름을 명기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춘추관기사관 강치성(康致誠) 등과 몰래 해당 사초를 꺼내어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양성지(梁誠之)에 관계된 내용 등에 6사(六事)를 고쳐서 납입하였다.
곧 이 사초 개정이 탄로나면서 의금부에 수감되어 사형으로 논죄되었다. 그러나 예종이 동궁(東宮)으로 있을 때 서연관(書筵官)이었다는 인연과 독자(獨子)라는 입장이 고려되어 특별히 죽음을 면하고 제주도에 관노(官奴)로 예속되었다. 1477년(성종 8) 죄에서 풀려서 예문관봉교에 제수되었다. 그 뒤 예문관응교·사간원사간 등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