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남수는 해방 이후 『그리고 그 이후』, 『어딘지 모르는 숲의 기억』 등을 저술한 시인이다. 1933년 『조선문단』에 희곡 「기생촌」이 입상했다. 1939년 『문장』에 정지용의 추천으로 「심야」·「마을」 등 6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본격적으로 데뷔했다. 1994년 사망할 때까지 『초롱불』(1940)·『갈매기 소묘』(1958)·『새의 암장』(1970)·『그리고 그 이후』(1993) 등 8권의 시집을 발간했다. 박남수는 ‘빛’과 ‘어둠’, ‘삶’과 ‘죽음’이라는 대립적 심상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새의 상징적 이미지로 형상화하여 ‘새의 시인’이라고도 불린다.
평안남도 평양(平壤) 출생. 1937년 평양의 숭인상업학교를 거쳐, 일본에 유학하여 1941년 쥬오대학[中央大學]을 졸업하고 돌아와 곧바로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 진남포지점에 입사하였다. 1946년에는 조선식산은행 평양지점장으로 승진, 1 · 4후퇴 당시 국군을 따라 월남하였다.
1954년 『문화예술』 편집위원, 1957년 한국시인협회 창립회원 및 심의위원회 의장, 1959년 『사상계』 상임편집위원, 한양대학교 문리대 강사(1973)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가족들을 미리 미국으로 보내놓고, 국내에서 일자리를 찾아 전전하다가 구하지 못하고 1975년 가족들이 있는 미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살다가 1994년 9월 17일 미국 뉴저지주 자택에서 사망했다.
그의 작품 발표는 1933년 『조선문단』에 희곡 「기생촌(妓生村)」이 입상된 것에서 비롯된다. 그 뒤 그는 시작(詩作)으로 전환하여 『시건설(詩建設)』과 『맥(貘)』 등의 시 전문지와 신문에 작품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아무래도 그가 문단에 본격적으로 데뷔한 것은 1939년 『문장(文章)』에 3회에 걸쳐서 정지용(鄭芝溶)의 추천으로 「심야(深夜)」 · 「마을」 · 「주막(酒幕)」 · 「초롱불」 · 「밤길」 · 「거리(距離)」 등 6편의 작품을 발표하면서 시작된다.
이후 그가 사망할 때까지 『초롱불』(동경 삼문사, 1940) · 『갈매기 소묘(素描)』(춘조사, 1958) · 『신(神)의 쓰레기』(모음사, 1964) · 『새의 암장(暗葬)』(문원사, 1970) · 『사슴의 관(冠)』(문학세계사, 1981) · 『서쪽 그 실은 동쪽』(인문당, 1992) · 『그리고 그 이후』(문학수첩, 1993) · 『소로(小路)』(시와 시학사, 1994) 등 8권의 시집을 발간하였다.
그리고 1982년 김종한(金鍾漢)과 함께 지식산업사에서 ‘한국현대시문학대계’ 21권째로 펴낸 시집과 1991년 미래사에서 출간한 『어딘지 모르는 숲의 기억』 등 2권의 시선집, 그리고 같은 해 삼성출판사에서 간행된 재미 3인 시집 『새소리』 등을 통해 총 350여 편의 시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이밖에 「현대시의 성격」을 비롯하여 몇 편의 평론과 잡문이 있으나, 그 수에 있어서 극히 제한된 것으로 보아 그는 일생을 통하여 오로지 시작에만 몰두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훌륭한 표현만이 예술가의 특권이며, 사상을 사상으로만 제공한 것은 예술작품이 아니다.”라고 한 그 자신의 말과도 같이, 박남수는 실지 시작에서도 청각(聽覺이나 시각(視覺)을 통한 선명한 이미지와 시어구사로서 표현을 가다듬고 있다.
흔히 그를 일컬어 ‘새’의 시인이라 하고 있듯이, 그는 선명한 이미지와 그것을 통한 순수성의 지향이 시적 특색이 되고 있다. 한마디로 박남수의 시세계는 ‘빛’과 ‘어둠’, ‘삶’과 ‘죽음’이라는 대립적 심상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적 지향은 ‘새’의 상징적 이미지로 형상화되고 있다.
그는 말년에 미국으로 이민하여 낯선 땅에 살면서도 민족시를 통해 삶의 의미와 가치를 획득하려고 부단히 노력한 시인으로 이미지의 조형성(造形性)과 현대적 지성(知性)을 바탕으로 한 주지적 서정시를 쓴 것이다.
수상경력으로는 제5회 아시아자유문학상(1958)과 공초문학상(空超文學賞, 1992)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