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9년(인조 17) 진사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고, 1643년 건원릉(健元陵) 참봉이 되었으나 얼마 후 사직하였다. 1644년에 사산감역(四山監役), 1646년에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의 시직(侍直) · 위수(衛率) · 익찬(翊贊)을 거쳐 사어(司禦)에 이르렀다. 1648년 흡곡현령(歙谷縣令)에 재직할 때에 동생 박세당이 할머니와 어머니를 모시고 가을에 흡곡을 방문하여 다음해 봄까지 머물렀다. 박세당은 여행 당시에 지은 시들을 모아 「동행습낭(東行拾囊)」으로 기록했다(『서계집』 권 1 수록).
이후 공조정랑과 마전군수(麻田郡守)를 역임하였고, 1654년(효종 5) 춘당대정시(春塘臺庭試)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55년 성균관 직강(直講)과 사헌부 장령(掌令)에 임명된 후 대각(臺閣)에 출입하며 국정 운영에 관해 다양한 논의를 제기하였다.
이후 정언 · 문학(文學) · 집의(執義) 등의 직책과 충청도 청풍군수 · 강원도사 · 통진현감(通津縣監) 등을 역임하였다. 1669년(현종 10)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보덕이 되고 동부승지 · 병조참의 · 좌부승지를 지냈다. 군읍(郡邑)을 다스릴 때 청렴하여 백성으로부터 인심을 얻었으나, 관리들의 비위에 맞지 않아 중상모략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