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대관(大觀), 호는 하곡(霞谷). 증 영의정 박소(朴紹)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사재감정(司宰監正) 박응천(朴應川)이고, 아버지는 좌참찬 박동선(朴東善)이며, 어머니는 청선군(淸城君) 이걸(李傑)의 딸이다.
1619년(광해군 11)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로 보임되었다가 아버지가 폐모론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양사(兩司: 사헌부·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유배되자, 사직하고 시골에 내려와 독서로 자적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에 참여해 정사(靖社) 3등공신에 책록되었다. 같은 해 홍문관정자·박사를 거쳐 다음 해 사간,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사헌부의 장령(掌令)·집의(執義), 검상 등을 역임하였다.
1625년(인조 3) 부응교 유백증(柳伯曾),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나만갑(羅萬甲) 등과 함께 대사헌 남이공(南以恭)을 광해군 때에 당파를 만들고 권력을 휘둘렀다는 이유로 탄핵했다가 오히려 함평현감으로 좌천되었다.
1626년 문과 중시에 급제해, 다음 해 동부승지가 되어 호패법 강화를 주장했고, 그 뒤 대사간·병조참지·병조참의를 지냈다. 이어 강원도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않았으며, 다시 대사간으로부터 붕당을 만들어 자기 파를 천거했다는 탄핵을 받고 좌천되어 남원부사가 되었다.
남원부사로 임명될 때에 새 수령을 영접하러 나온 아전이 박정을 보고는 “젊은 사람이 말도 하지 않고 웃지도 않으며, 오똑하게 단정히 앉아 있어 마음속을 알 수 없다.”고 칭찬하였다. 당시 관내의 도적을 색출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금주군(錦州君)에 봉해지고 1631년 대사간·대사헌을 거쳐 이조참판에 특진되었다가 홍문관부제학에 임명되었다. 인조반정 이후 소서파(小西派)의 핵심 인물로 비록 말은 과감하게 한다는 칭찬이 있었으나, 급하고 곧은 뜻이 지나쳐 자기 의견만을 주장하였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