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경승(景承), 호는 우계(尤溪). 박눌(朴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박종린(朴從鱗)이고, 아버지는 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 박지(朴芝)이며, 어머니는 밀양박씨(密陽朴氏)로 호군(護軍) 박언상(朴彦商)의 딸이다. 숙부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88년(선조 21) 사마시에 합격했고, 1597년 정유재란 때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지키며 항전하였다. 1607년 건원릉참봉(健元陵參奉), 1608년 창릉참봉(昌陵參奉)이 되었으며, 1609년(광해군 1)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에 임명되었다.
1611년 북평사(北評事)를 거쳐 1613년 전적(典籍)으로 승진하였다. 그러다가 그 해 4월 정조(鄭造)·윤인(尹訒) 등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하려 하자, 부당함을 극렬하게 상소하고 귀향하였다. 다시 예조좌랑(禮曹佐郎)과 정랑(正郎), 사예(司藝)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618년 특명으로 북도순무어사(北道巡撫御史)가 되어 입소(入召: 부름을 받고 들어감)한 뒤 북관(北關)으로 가서 민심을 수습, 진무(鎭撫)하고 돌아오니 대비가 이미 폐출되어 서궁(西宮)에 부처되었으므로 곧 소백산 우수동(愚叟洞)에 들어가 칩거하였다.
그러나 그 뒤 통례원좌우통례(通禮院左右通禮)와 상의원정(尙衣院正)에 임명되었으며, 1620년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제수되었다. 이 해에 북평사를 역임했고, 그 뒤 우승지(右承旨)를 거쳐 1621년 분병조참의(分兵曹參議)가 되었다.
이 때 조우인(曺友仁)과 함께 입직(入直: 궁궐로 근무하러 들어감)하면서 인목대비 유폐에 대한 비판의를 지었는데, 이를 백대형(白大珩)이 이이첨(李爾瞻)의 무리에 고변, 조우인과 함께 체포되어 의금부에 하옥되었다가 인조반정으로 풀려났다.
1623년(인조 1)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에 임명되었으며, 곧 울산부사(蔚山府使)가 되었다. 1627년 우승지가 되어 호란이 일어나자 대가(大駕: 임금의 행차)를 호위해 강도(江都)에 들어갔다가 난이 평정된 뒤 돌아왔다.
죽은 뒤 영남 사림의 발의로 순흥의 도고서원(陶皐書院)에 봉안되었다. 저서로는 『우계일고(尤溪逸稿)』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