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반남(潘南). 1790년(정조 14)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 1794년 대사간에 재직 중 김종수(金鍾秀) 사건의 처리가 소홀하였다고 하여 파직, 다음 해 다시 대사간으로 복직되었다. 1801년(순조 1) 이조참의를 거쳐, 황해도관찰사에 재임 중 부세(賦稅: 세금의 부과)의 개정에 노력하여 농민의 부담을 덜어주기도 하였다.
1803년 대사간·이조참의를 역임하면서 공적을 쌓아 가선대부로 가자되었고, 다음 해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 이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806년 비변사제조(備邊司提調), 형조·이조·공조 판서, 대사간·판윤 등 요직을 두루 거쳐, 다음 해 광주부유수(廣州府留守)가 되었다.
1809년 병조판서로 있으면서 공로가 있어 숭정대부에 가자되고, 동지사 겸 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11년 공조·병조·이조판서, 판윤·좌참찬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판의금부사·형조판서·세자시강원좌부빈객(世子侍講院左副賓客)·공조판서·원접사(遠接使)를 거쳐, 1813년 판돈녕부사·판윤·예조판서·좌참찬을 역임하였다.
1816년 이조·예조·공조판서를 역임하였고, 다음 해 함경도관찰사를 거쳐, 1819년에는 판의금부사가 되었다. 다음 해 공조판서를 거쳐, 1821년 병조판서, 이듬해 세자시강원좌빈객(世子侍講院左賓客)이 되고, 1826년 판돈녕부사, 1830년 좌빈객을 거쳐, 1831년 판중추부사로 재직 중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