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여장(汝障). 아버지는 풍천부사(豐川府使) 박영신(朴榮臣)이며, 어머니는 이광악(李光岳)의 딸이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아버지는 풍천성을 사수하다 방어사(防禦使) 이중광(李重光) 등과 함께 포로가 되어 반장(叛將) 이수백(李守百)에 의하여 피살되었다.
이수백은 반란군의 형세가 불리해지자 이괄의 목을 베어 투항, 죽음을 면하고 절도(絶島)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서울로 돌아왔다. 동생 박지원(朴之垣)·박지번(朴之蕃) 그리고 이중광의 아들 이문웅(李文雄)·이문위(李文偉) 등과 함께 수년간에 걸쳐 복수할 기회를 노리던 박지병은 1634년 마침내 이수백을 죽이고 돈화문(敦化門)에 나아가 대죄하였다.
조정에서는 극형에 처하려 하였으나 윤방(尹昉)·김류(金瑬)·오윤겸(吳允謙) 등이 효성의 지극함과 한문공(韓文公)의 고사(故事)를 들어 이들을 적극적으로 변호, 5인 모두 감등되어 유배되는 데 그쳤고, 박지병도 창평(昌平)에 중도부처(中途付處)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그 뒤 천거로 정릉참봉(靖陵參奉)이 되고, 제용감봉사에 올랐으나 곧 사직하고 향리로 돌아왔다. 말년에 노인직으로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에 제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