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밀성(密城). 자는 여인(汝寅), 호는 괴천(槐泉). 박현(朴睍)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서산유씨(瑞山柳氏)로 유정기(柳禎麒)의 딸이다. 유년시절에 큰아버지 박돈(朴暾) 밑에서 공부하여 약관에 경학(經學)과 사서(史書)를 두루 섭렵하여 경주부윤이 실시하는 하과(夏課)에 장원으로 뽑혔다.
그 뒤 1666년(현종 7) 사마시에 합격하여 내사(內舍)에 임명되었다. 박창우는 성균관 유생시절에 『주자대전(朱子大全)』의 간행에 많이 공헌하였으며, 1684년(숙종 10) 유생의 수반(首班)으로서 호남유생들의 상소문사건으로 인하여 유배되었다가 혐의가 없음이 밝혀져 곧 풀려났다.
그 뒤 김방한(金邦翰)·유극배(柳克培) 등과 함께 『주역집해(周易集解)』 3권을 찬술하여 경연(經筵)에 진상하자 왕이 극찬하여 내각(內閣)에서 감정(勘訂: 헤아려 정정함)하여 간행하도록 명하였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시의 학자들은 『주역』에 대하여 발군의 실력을 갖춘 그를 고려 때 역동(易東)으로 불린 우탁(禹倬)에 비하여 ‘역남선생(易南先生)’이라고 일컬었다.
후에 동궁폐위사건이 일어나자 성균관의 유생 92인과 혈서로 세자를 구하려는 상소를 하였다.
아울러 국정과 시폐에 대한 대책으로서 현재(賢才)를 중용(重用)하고 농업과 학문을 장려하며 국방의 수비를 철저히 할 것 등을 건의하였다. 한편 사회를 정화하는 제도적인 방법으로 19조항으로 된 향음주례의식(鄕飮酒禮儀式)을 제안하였으며, 저서로는 『괴천문집(槐泉文集)』 2권 1책과 『주역집해』 3권이 있다.